'식물처럼 함께 살아요', 미술로 전하는 공동체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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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처럼 함께 살아요', 미술로 전하는 공동체의 가치
  • 이철승
  • 승인 2022.12.1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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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살며 미술작가로 활발히 활동
식물을 통해 바라본 ‘공동체’의 소중함
성좌원의 아픔, 미술로 조명하고 치유해
성다솜(미술·09) 동문
지난달 성다솜 동문의 작업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진정한 예술가는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스페인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남긴 말이다. 미술이란 단순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그 이상의 감정과 울림을 전달하기도 한다. 캔버스 안에만 갇히지 않고 때로는  조형물로, 때로는 벽화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함께한다.  
 이곳 안동에서도 미술을 통해 아름다움 그 이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미술가가 있다. 성다솜 동문은 ‘솜아트’소속 작가이자 우리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해 안동과 타지를 오가며 작품활동에 힘쓰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안동 옥동에 있는 한센인 마을 성좌원의 버려진 교회를 미술관으로 바꾸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성 동문을 비롯한 청년작가들이 힘을 모아 폐허가 된 교회를 꾸미기 시작했고, 성좌원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한센인 마을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핍박받던 성좌원이 오명을 벗고 미술로써 새로운 숨결을 부여받은 순간이었다. 나아가 올해는 미술 수업을 통해 성좌원 주민들이 직접 작가로 참여하며 더욱 뜻깊은 전시를 열기도 했다.         
미술을 통해 차별없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성 동문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설치미술과 회화를 하고있는 작가 성다솜이다. 주로 하는 일은 전시 기획이고, 벽화나 조형물 같은 공공미술 사업도 같이 하고있다.

Q. 안동대 미술학과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자면 어떠신가요?
수능 이후 서울에서 미술 입시를 준비하면서 학원에 다녔다. 그때 성적에 비해 좀 높은 대학교를 목표로 잡고 다군에 안동대를 지원했다. 그런데 나머지 대학은 다 후보가 되고 안동대만 붙어버려서 선택의 여지없이 그대로 입학했다. 국립이기도 했고, 부모님도 안동대를 나오셨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안동대에 입학한 것 같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서울에 가지 못한 아쉬움도 남고, 편입할까, 유학 갈까, 이런 생각에 불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쓸데없는 고민인데 1학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해서 뭐가 될까?’ 그런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기억에 남는 점이라면 미술학과 작업실이 참 좋았다. 작업환경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다른 학교 미술학과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열악하고, 마땅한 공간이 없어서 따로 작업실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친구들과 야작도 많이 하고, 놀기도 하고, 추억이 많다.  

Q. 우리대학 미술학과가 그린 송천초 앞 벽화에 작가님 이름이 적혀 있던데, 그때가 기억나시나요?             
학과 수업의 일부였다. 당시에 벽화 전문가 선생님을 모시고 한 2박 3일 정도 벽화를 그렸다. 학기 중에는 수강생들이 전부 벽화 시안을 그려보고, 거기서 뽑힌 그림을 벽화로 그리는 수업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벽화를 그려본 적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참여한 것 같다. 아직도 그 벽화가 그대로 남아있다니 신기하다. 

Q. 이전에 미술강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유로 지금 일을 시작하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입시미술을 배운 경험을 살려 1학년부터 미술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3일씩, 밤 7시부터 10시까지 일했다. 좀 쉬다가 4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서 3,4년 정도 계속했다. 그런데 내가 강사로 일하던 시절에 짜증이 진짜 많았다. 친구들도 항상 한마디씩 하고 그랬다. 강사 일이 학생들 대학이 걸려있는 일인데, 나도 입시를 겪어봤고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기에 책임감이 너무 컸다. 밤낮이 바뀌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에 묶여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계속 예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이유는 내 작품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강사를 하다 보니까 작품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 작품 때문에 학생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면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발전하고 더 잘 그리는 모습을 보면 뿌듯했지만, 그에 비해 내가 느끼는 행복은 크지 않았다.  
               
Q. 그럼 강사를 그만두고 바로 작품활동에 뛰어드신 건가요?

작품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작가들이 투잡을 많이 한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일은 벽화였다. 솜아트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잘 풀리진 않았다. 그래도 2년, 3년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갔다. 음식점 간판도 그리고, 가게 내부 그림도 그렸다. 그려달라고 의뢰가 들어오는 모든 걸 그린 것 같다. 작은 간판 그림은 그다지 많은 액수는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작품활동에 필요한 큰 돈이었다. 내 뜻과 무관하게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맞춰줘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벽화를 보고 좋아하면 뿌듯했다.     
벽화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작품활동에 도움을 준 부분도 있다. 내 작품에 자주 쓰이는 포맥스라는 재료도 벽화 일을 하면서 처음 만져봤다. 우레탄의 일종으로 벽화나 자동차 도색 같은 산업 현장에서 자주 쓰는 재료다. 그냥 작업실에 앉아 그림만 그렸더라면 그런 것도 몰랐을텐데, 일하면서 직접 만져보니 ‘내 작업에 써도 괜찮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포맥스를 활용한 설치 작업이 시작됐다. 이런 부분에서도 벽화 일에 고마움을 느낀다.     

Q. 작가님 작품에는 늘 식물이 있고, 특히 선인장이 돋보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내가 표현하는 것은 다양한 색을 가진 식물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다. 설치 작품인 <식물공동체>는 한 공간에서 식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식물구성원>은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을 하나하나 잘 관찰할 수 있게 평면으로 작업한 작품이다. 
처음 작업실을 잡고 식물을 키우게 됐는데 좀 신기하고 책임감도 많이 느꼈다. 물도 주고, 식물이 자라는 걸 보면서 느낀 건 어느 하나 똑같은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물을 더 많이 먹고, 어떤 아이는 햇빛을 싫어하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식물에 더 많이 관심이 갔다. 
선인장은 전부터 많이 그리긴 했다. 선인장을 보며 사람들이 얽혀 살면서 때로 상처받고, 가시처럼 서로를 찌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찔린 상처들이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치유 받는다는 내용을 그림에 담았다. 하지만 여러 식물을 키워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다 선인장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식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Q. 설치미술을 하다 보면 일반 회화와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 어떤 변수와 어려움이 있는지, 또 그걸 극복하면서 느끼는 설치미술만의 매력이 뭔지 궁금합니다. 
설치작업은 아무래도 스케일이 크다. 실내에서 작업이 어려워 따로 야외 작업실이 필요할 때도 많다. 반면에 평면작업은 스케일이 비교적 작아서 실내에서 거의 작업이 가능하고 정적인 부분이 있다. 전시 방법도 차이가 있다. 평면작품은 벽에 걸면 끝나는 반면에 설치미술은 작품 외에도 전시실 공간 활용까지 고민해야 한다. 설치를 위한 구조물, 천장, 벽까지 다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재밌다. 내 작품으로 인해 그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성취감이 엄청나다. 

Q. 성좌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처음 성좌원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시관이 된 성좌교회 건물은 2006년을 마지막으로 15년 넘게 방치된 상태였다. 성좌원 쪽에서도 이 건물을 두고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이 많으셨다고 한다. 마침 2020년에 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예술 활성화라는 목적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 예산이 각 지자체로 내려왔다. 그때 안동시 문화도시팀에서 우리 청년 작가들에게 성좌원 프로젝트를 맡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근데 제시받은 예산으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회의적인 시선으로 처음 성좌교회에 가본 순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건물이 너무 예뻤다. ‘이거 아니면 안된다’는 마음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면적도 너무 크고 고칠 부분도 많아서 이 예산으로는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Q. 한센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전시 준비 단계부터 속상한 일이 잦았다고 들었습니다. 반대로 한센인 어르신들도 외부인을 꺼리셨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교회를 정리하면서 청소업체를 불렀다. 그런데 업체가 ‘전염병 시설이니까 우리가 가기 전에 소독해달라’고 하더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더럽다, 전염병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전시관 2층에 있는 영상을 보면 아시겠지만(성 동문과 솜아트는 성좌원 주민들의 삶을 직접 인터뷰해 영상으로 아카이브화 했다), 우리는 그분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들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을 겪으니 도대체 이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나 싶더라. 
어르신들도 처음에는 외부인들이 드나드는 것에 시큰둥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인사드리고, 같이 작품활동도 하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좋은 일 한다’, ‘교회가 안 없어져서 다행이다’ 이렇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사실 주민분들과 함께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많고, 대부분 연로하시다. 처음 성좌원에 들어올 때 120분 정도 계셨는데 최근에는 90분 정도 계신다고 들었다. 빨리빨리 뭔가 많이 체험시켜드리고 싶다. 지금 진행하는 미술 수업도 어르신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그림 같은 걸 어떻게 그리냐고 하시다가도 막상 수업 날이면 일찌감치 도착하셔서 2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림에만 집중하신다. 보통 발병이 어려서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고 꿈을 제대로 못 펴신 분이 많다. 미술뿐만 아니라 서예나 음악 같은 다양한 활동들을 접해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Q. 성좌원을 보면서 미술이 단순히 예술품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생각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을까요? 
작품을 통해 계속 이야기하는 바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공동체를 그리고 싶다. 내가 말로만 ‘더불어 살자’ 외쳐봐야 얼마나 큰 영향이 있겠나. 그렇지만 식물공동체로 시작해서, 성좌원을 통해 전시로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보여주면서 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Q.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는 이유로 불안해하는 후배들, 꿈과 돈 사이에서 고민하는 후배들을 위해 해주실 조언이 있을까요?         
나도 항상 불안감이 있었다. 모든 문화의 중심은 서울이고, 거기 끼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안동에서 작업실을 잡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전시를 해보면서 느낀 건, 안동이라서, 서울이 아니라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작업 공간만 비교해보더라도 서울에서는 이만한 규모의 작업실을 구하기도 힘들고, 아무래도 큰 작업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또 지역 작가로서 초청받을 기회도 생기고, 좀 더 주목받을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물론 서울보다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여기서 기회를 잡아서 인정받고 나아가 서울에서도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꿈과 돈의 균형은 나도 아직 고민 중이다. 분명한 건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생의 모토다. 올해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돈을 많이 포기했다. 돈을 포기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걸 계속 하고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돈이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걸 못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계속 오락가락 반복되는 고민같다.
그냥 앞으로도 쭉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뭐든 잘 해냈으면 좋겠다. 그게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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