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을 위한 짧은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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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을 위한 짧은 행복론
  • 안동대학교 신문사
  • 승인 2022.11.0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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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혹은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행복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영어 happy는 그 어원을 행운을 의미하는 lucky에 둔다. 한자어 행복 幸과 福 모두 운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와, 운이 참 좋았어!”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라는 말을 할 때 느꼈던 각자의 감정을 기억해보자. 어려운 답은 아닐 것이다. 이럴 때 느끼는 우리의 기분은 나에게 기쁨의 만족감을 선사하는 쾌락의 감정으로 바꿔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이러한 감정적 쾌락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토론토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조던 피터슨은 행복은 결코 좋은 것과의 동의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본능적 욕구의 완전한 만족만으로는 행복의 기초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두 학자의 말을 종합하면 본능적 욕구의 쾌락은 어쨌든 행복의 한 부분으로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복의 기초를 세우는 쾌락 이외의 나머지 부분이 필요하다. 행복을 채우는 나머지 한 부분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철학자 카를 힐티는 고통이란 행복의 가장 확실한 보장이라고 주장한다. 언뜻 보기에 고통이라는 단어와 행복은 모순적 관계로 보인다. 하지만 모순적 관계를 변증법적 관계로 바꿔 생각해 보자. 변증이란 대립적인 두 주장(쾌락‧고통)이 더 높은 고차원적 주장인 합(행복)에 통합되는 것을 뜻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행복의 두 요소인 고통과 쾌락의 변증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 관계를 의미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행복이란 평화가 아닌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이란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난관과의 싸움을 뜻할 것이다. 이러한 싸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장의 느낌, 전쟁이 준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이 곧 행복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덧붙여 행복이란 일회성의 만족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많은 힘의 필요성과 그러한 힘을 쟁취한 성취감의 연속이라고 설명한다. 힐티도 행복이란 고통을 겪어내고 그것을 성숙의 기제로 활용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성취감이라는 쾌락과 연결될 수는 없다.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행복의 요소로서 고통이란 더 무거운 무게를 견디거나 극복할 수 있게 자신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비계(飛階)를 뜻한다. 그리고 비계를 발판 삼아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성취감이라는 쾌락일 것이다. 


   나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통,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취감, 이 두 가지 요소는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건강한 고통과 건강한 쾌락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클레어몬트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과제 수준과 자기 능력 사이의 접점에 존재하는 통류(通流) 경험,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몰입(flow) 개념을 소개하며 역사적으로 창의적 성취를 이룬 위인들의 행복을 이야기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건강한 쾌락은 건강한 고통을 갈구하고 극복된 건강한 고통은 다시금 건강한 쾌락의 감정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두 요소는 서로를 갈망하는 열정적인 상호호응의 관계인 것이다. 인간은 잠재성을 현실화하고 죽는 날까지 배우며 성장해야 하는 존재이다. 결국 이런 인간다운 삶에 있어 건강한 고통과 건강한 쾌락 사이의 순환 관계로 규정되는 행복은 빼먹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건강한 고통과 건강한 쾌락의 순환으로서 행복 개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각종 매체에서 말재주로 출세한 유명 강사들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힐링’하려 애쓰는 시대이다. 청년실업과 자살률을 언급하며 기성세대의 잘못을 앞다퉈 비난한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그 당시 역시나 청년세대였던 지금의 기성세대는 경제공황과 더불어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극빈국 수준의 영아사망률 등을 마주하며 생존 그 자체를 위해 투쟁해온 세대였음을 기억하자. 사실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이 시대는 한민족의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번영의 시대다. 인간의 행복에 있어 진정한 비극은 각자의 삶에 내재한 고통 속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무능이라고 지적한 니체의 말에 주목하자. 홀로코스트의 참상에서 생존한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도 경제적 번영이라는 풍족함 안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현대인을 비판하며 개인 행복의 실현은 자기 삶에 놓인 각자의 과제를 인식하고 그 과제에 뛰어들어 성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점을 고려한다면 행복에 있어 근본적인 걸림돌은 우리 삶 앞에 주어진 과제에 대한 무관심과 이러한 무관심으로 귀결되는 삶의 지루함, 곧 현시대에 전염병처럼 퍼져버린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라는 비극일 것이다. 


    이상의 짧은 행복론을 두고 혹자는 청년세대의 ‘노오오력’만을 강요하는 어느 꼰대의 ‘자기 책임론’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가 소개하는 행복론의 요지는 명확하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 아니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위해 스스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행복을 위해 일단 찾아야 하는 건강한 고통으로서의 과제는 정치활동에서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공부 그리고 규칙적인 시간에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수업 시간에 지각하지 않는 일까지 그 내용과 수준이 매우 다양하다. 행복을 쟁취하려면 자신의 수준에 맞는 작은 일에서부터 문제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용감하게 극복하고 꿀맛 같은 성취감을 즐기는 일련의 경험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다른 성취감을 위해 삶의 문제 수준을 하나씩 올려보며 행복의 여정을 꾸준히 이어가자. 행복은 쾌락적 만족의 문제이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의지와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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