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청년이 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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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청년이 어딜
  • 이철승
  • 승인 2022.09.0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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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선다고 되겠어?”
‘효능감’ 잃은 청년들

사실은 쓰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다. 알바도 하고 스펙도 쌓고, 공부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이 사회가 생각하는 대학생의 전형에 맞춘 아주 깔끔하고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서 굉장한 허무와 무기력감에 빠져 내 이름을 걸고 어떤 의견도 피력하고 싶지 않아졌다.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도, 심지어 하버드를 나와도 ‘일개 어린놈’ 취급받는 세상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넘지 못할 벽 아무런 의견도 내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막상 자판을 앞에 두니 쌓이고 쌓였던 말들이 마음을 헤집는다. 그러나 나는 입을 열 수도,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사회적인 문제는 고사하고 편집장을 달고있는 이 자리에서조차 나에게는 힘이 없다. 예컨대 사설(社說)이란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서 그 사의 주장으로 게재하는 논설이다. 대개는 논설위원이 사를 대표해 무기명으로 작성한다. 그러나 안동대신문에서는 예외다. 애당초 선임된 논설위원이 없음에도, 그렇다면 편집국 내부에서 작성함이 마땅함에도 외부 교수에게 사설을 청탁한다. 청탁을 받는 교수는 주로 언론사 운영위원회 소속 위원이긴 하나 신문 발행과정과 기사의 논조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관례가 그렇고 규정이 그렇다는데 혼자 열 내봐야 뭐 어찌할 방도가 없다. 내 손으로 쓰는 내 신문하나 마음대로 못 바꾸는데 사회문제는커녕 지역이며 학교는 누가 무슨 힘으로 바꿀 수 있을지 참 회의감이 든다.  

내가 입을 열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럴만한 대단한 능력도 없지만, 설령 여기서 날카로운 촌철살인으로 국가를, 혹은 대학을 비판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괜히 알량한 글솜씨로 ‘나만 이렇게 깨어있어’하고 자기 위안에 머무르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합니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가장 흔히 거론되는 해결책이 소위 ‘청년 위원’, ‘학생 위원’이다. 꼭 정치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기관, 단체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때는 연일 뉴스에 나와 혁신적인 발언들을 뱉어대는 그들을 열렬히 응원했고, 지금도 마음 한편에는 그런 마음에 남아있다. 그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 새 리더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최근 뉴스들을 보며 이 역시 허상이라고 깨달았다. ‘청년’ 이름표를 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일부 정치인들은 그저 높으신 분들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춤추는 공연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대체로 이들의 결말은 충직한 사냥개, 혹은 토사구팽 둘 중 하나다. 그분들을 딱히 비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이득은 엉뚱한 양반들이 보는 이 상황이 참 안타깝다. 000계, 000키즈, 아바타, 0핵관이라는 말이 괜히 유행했을까. 기본적으로 잡아 끌어줄 연줄이 없으면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세상이다. 행여라도 당당하게 자신만의 소신을 외쳤다간 순식간에 ‘배신자’로 낙인찍혀 매장당하기 일쑤니까. 세상 모두가 노무현 정신을 찾지만 미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소신있게 “이의 있습니다”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게 되겠어?

이 세상에는 세계, 국가, 지역, 학교, 세대 등 수많은 주제를 두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청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몇이나 될까. ‘노오력’, ‘가능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효능감’이다. MZ세대가 이기적이라며 ‘나 하나쯤이야’를 지적하곤 하지만 정작 청년들이 생각은 ‘내가 한다고 달라지겠어?’에 가깝다. 효능감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문제 해결에 대한 의견을 내본 경험도, 낼 기회도 잘 없었을뿐더러 어렵게 낸 아이디어마저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런 의미에서 적지 않은 청년들에게 정치적 효능감을 제공했던 젊은 정치인의 이탈이 몹시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온전한 자유의지를 반영시킬 수 있는 곳은 고작해야 저녁메뉴 뿐이다. 하물며 점심 메뉴 하나를 정하더라도 높으신 분과 먹을 때는 일개 청년이 맞춰드려야 하는 장유유서의 국가에 살고 있으니까. 조직의 대표로 선출되고도 나이 많은 조직원에게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 따위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는 나라에서 무얼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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