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아닌 행복을 꿈꾸는 사회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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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닌 행복을 꿈꾸는 사회를 위해
  • 이철승
  • 승인 2022.05.11 2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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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민주항쟁 앞장선 박명배 동문
이제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인
청년, 돈이 아닌 행복을 찾길 바란다

자랑스러운 솔뫼인을 찾아 <70> 사회적경제허브센터 이사, 박명배(지질·88) 동문

 

 

다시 오월이다. 그날을 기억하며 당시 학생투쟁국장의 자리에서 타도 군부를 외쳤던 박명배 동문을 만났다. 현재 사회적경제허브센터에서 이사직을 맡은 박 동문은 대학 시절과는 또 다른 위치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돈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지역공동체와 상생하는 경제활동, 일명 사회적 경제를 전파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여념이 없다.    

처절했고, 뜨거웠고, 고독했던 91년의 이야기. 그리고 돈보다 사람이 행복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박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학원민주화를 향한 학생의 외침

1988년에 지질학과 1회 입학생으로 안동대에 들어왔다. 안동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여건상 안동대를 가는 게 어쩌면 당연했던 것 같다.

학생운동을 시작한 시기는 88년 2학기다. 당시 학교 예산 중 국고보조금을 제외한 기성회 예산은 100% 학생들의 등록금이었다. 이 기성회 예산 중 2,000만 원을 학장님, 지금의 총장 자리에 해당하는 분이 본인 집 대문 수리에 사용한 사건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학생들이 학장실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여기에 참가한 것이 단초가 돼 계속 학생운동에 나섰다.

당시 학교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가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반미애국학생회’였다. 92년도에는 ‘자주적 학생회론’을 펼치며 직접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전까지 활동가 조직은 학생회와의 별도 노선을 구축했다. 운동권에서 총학생회장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당시 매우 이례적이었다.  

제일 격렬했던 시위는 90년 후반, 학교에서 북한영화 ‘소금’과 ‘탈출기’를 상영했을 때다(북한문화 바로알기운동의 일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전투경찰(전경)이 캠퍼스로 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이미 전남대에서도 북한영화 상영이 한차례 문제가 됐던 터라 경찰도 필사적으로 저지에 나섰다. 포진교 건너 사료공장에 전경이 몰렸다. 살펴보니 35인승 버스가 늘어섰고 그 수가 2,000명에 달했다. 그때 나는 포진교 중간에 불을 질렀다. 다리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3, 40분 동안 학생과 전경이 대치했다. 전경은 학교 진입에 성공했지만 격분한 학생들과 전면 충돌했고 결국 물러났다. 어떻게 보면 학교에서 유일하게 이긴 시위라고 볼 수 있다.  

 

치열했던 투쟁, 남달랐던 김영균 열사

90학번을 소위 전교조 1세대라고 부른다. 정말 똑똑했다. 이 친구들은 우리가 대학 1, 2학년 때 학습한 경제, 역사, 철학서를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읽고 토론했다. 나도 선배지만 영균이보다 못했다. 영균이는 ‘왜 우리 집회는 늘 단순할까’ 하는 권태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 민속문화연구회(민속학과 소모임 ‘마당’의 전신)를 만들어 마당극을 공연했다. 당시 시위의 개념은 단순하다. ‘5.18을 알리자’ 같은 주제로 연사가 이야기를 한 후에 노래를 부르며 전경을 뚫고 시내로 전진하는 것이다. 그럼 교문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다. 늘 이런 패턴의 반복 속에서 영균이가 마당극을 시도한 것이다. 직접 각본을 쓰고, 배우도 하면서 집회장을 공연무대로 삼았다. 그때 마당극이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열사가 떠난 이후의 시련

영균이 분신 이후에 분신 배후 사건이 만들어졌고 반미애국학생회 회원들이 안전기획부(안기부)에 잡혀갔다. 당시 군부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처럼 ‘열사가 자발적 선택이 아닌 누군가의 강요로 죽었다’는 배후설을 만들었다. 나도 분신 배후로 조사받을 당시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심정이었다. 영균이를 죽였다고 의심받는 상황 자체가 너무 괴로웠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렇지만 우리는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안기부는 특정 분신배후가 아닌 조직 사건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 때가 우리에게는 작은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지금까지 매년 총회를 열며 명맥을 이어가는 추모사업회는 전국적으로 우리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가 유일하다. 그만큼 끈끈한 이유는 우리가 함께 분신 배후 조작을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신배후 논란이 퍼지면서 우리가 여론전에서 완전히 밀려버렸다. 당시 언론 속에서 묘사되는 운동권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보따리 싸서 김일성한테 갈 태세였다. 하루는 시내 포차에서 술을 마시는데 옆에 앉은 손님이 그러더라. “안동대 애가 가위바위보 져가지고 죽었다더라. 우리 애 대학 보내려면 가위바위보 연습 잘 시켜야겠다”. 일반 시민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그랬다. 시민단체들도 ‘순번 정해가지고 죽으며 투쟁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냐’며 등을 돌렸다. 청년회, 종교단체, 농민회, 교원노조 전부 투쟁에서 빠졌다. 87년 6월 항쟁은 연대 투쟁이었지만 91년 5월의 학생들은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였다.

 

달라진 대학생의 역할

선진국은 학생이 시위를 할 필요가 없는 나라다. 우리나라도 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본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예전처럼 필사적으로 5.18을 알리지 않아도 TV에서 나오고, 집회 신고도 자유롭게 가능하다. 전경과 물리적으로 충돌할 일도 없다. 국가가 엄청난 진실을 은폐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민들이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시절 대학생이 목숨 걸고 절실하게 지켜내야 했던 가치가 민주주의와 왜곡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대학생에게 절실한 가치는 취업이다. 단지 시대가 변하면서 사안의 중요성이 달라졌을 뿐이다. 절대악은 사라지고 평화적인 시위가 뿌리내렸다.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91년 5월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 갖길

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은 ‘돈을 벌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반에 퍼진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선배 시대는 돈을 벌기 위해 가정을 포기했다. 돈을 안 벌어오면 가족이 불행해진다는 착각에 빠져서 가족과 보내는 행복한 시간을 포기한 것이다. 2000년 즈음에 사회복지사 활동 중 호주 연수를 간 적이 있다. 그곳 아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모든 사고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이뤄졌다. 어떤 이념도, 편견도 없이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이미 사고가 반 쯤 닫혀있다. 이건 사회주의, 이건 공산주의라고 스스로 검열한다. 거기에 돈에 대한 집착이 더해지면서 더욱 안타까운 상황이다. 호주, 유럽처럼 자유로운 사고가 일상화돼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지금 청년들의 문제는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좋은 직업을 갖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선진국은 국가가 국민을 돌보는 나라다. 현재 대한민국도 청소년·노인·장애인 등을 돌보는 사회서비스가 갖춰져 있지만 앞으로는 모든 국민을 국가가 돌봐야 한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만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행복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다.  

 

‘돈보다 사람’, 사회적 기업의 역할

사회적경제허브센터는 ‘지속가능한 사회적 경제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사회적 기업은 그저 착한 기업이 아니다. 돈이 아닌 궁극적인 목표가 있는 기업이다. 예전의 경제 구조는 단순했다. 인풋과 아웃풋이다. 자금을 투자하면 성과가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아웃풋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임팩트’가 필요하다. 예컨대 문제집을 사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인풋이라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아웃풋이다. 그렇다면 좋은 성적을 받으려는 이유는 뭔가? 대학을 가고 취업하기 위해서다. 그게 바로 임팩트다. 단순한 아웃풋이 아닌 궁극적인 목표를 생각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돈과 이윤만을 바라보지 않고 목표가 있는 곳이 사회적 기업이다.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신뢰’ 쌓아야

이제 ‘물질’의 시대는 갔다. 대기업이 사고파는 데이터는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훨씬 큰 가치와 힘을 갖는다. 신뢰와 협력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이 세다.  

선진국은 국가를 신뢰한다. 유럽 선진국 시민들은 국가가 나와 내 자식을 챙겨 주리라 믿고 돈을 낸다. 신뢰는 협력을 만들고, 소위 말하는 ‘거버넌스’를 형성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든다. 코로나19 백신을 봐도 그렇다. 처음 정부가 AZ백신을 수입했을 때 부작용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이 일면서 이후 화이자 백신을 수입하게 됐다. 그런데 영국이 개발한 AZ백신은 공익을 위해 원가 수준에 제공하는 반면 화이자는 제약회사가 이윤을 위해 판매하는 백신이다. 가격이 5~6배 가까이 차이난다.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당연히 화이자가 좋다고 생각해버린다. 또 다른 예시로 건강보험에 대한 불신도 심하다. 건강보험료가 아깝다고 여기고 오히려 민영 보험사를 신뢰한다. 실상은 건강보험이 지불한 보험료 이상을 돌려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거의 경제 발전 같은 문제는 똑똑한 한 명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근데 통일, 복지처럼 앞으로 해결할 문제들은 그렇지 않다. 패러다임을 바꿔 신뢰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미래를 위해 할 일이다. 국가제도는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 대한민국 역대 모든 정부는 국민이 선택한 정부다. 설령 그 선택이 잘못됐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일종의 훈련이고 성장과정이다.

 

청년, 창업으로 시야를 넓혀라

이런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들의 역할이 중요한데 정작 청년들은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다. 취업에 대한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단순히 청년들의 무관심을 탓하기 보다는 좁은 취업문과 청년들의 절실함, 그 내면을 꼭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대기업은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국가가 고용확대를 위해 투입하던 공적자금을 대기업이 거절한다. 그럼 그 돈은 창업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사회적경제허브센터 같은 기관이 필요하다.  

이런 곳이 전국에 80여 군데 있는데 목적은 청년의 취창업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적 패러다임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취업보다는 창업지원에 비중을 둔다. 우리가 국가 지원을 받고 진행하는 마을공동체 사업, 도시재생사업, 주민자치 활성화 전부 청년들에게 좋은 일감이다. 대기업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 찾아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 산재한 문제를 느끼고 해결해야 할 사람이 청년들이다. 절대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업으로 일자리를 찾으면 된다.

취업과 돈보다 사회적 가치와 사람을 생각하는 청년들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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