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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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 이철승
  • 승인 2022.03.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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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화재를 다루건 중요한 건 ‘사람’
사람 이야기로 박물관에 온기를 불어넣다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자랑스러운 솔뫼인을 찾아 <69> 국립항공박물관장, 안태현(민속·88) 동문

비행기 한 대 없는 나라에서 비행기를 수출하고 세계 최고의 공항을 가진 나라가 되기까지. 우리나라는 지난 100년 동안 식민지배와 전쟁, 가난의 아픔을 딛고 세계 최고수준의 항공 강국으로 도약했다. 국립항공박물관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역사와 위상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누구나 항공문화를 종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1월 이곳의 2대 관장으로 부임한 인물이 바로 안태현(민속·88) 동문이다. 안 동문의 국립항공박물관 소개와 함께 과감하게 도전했던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립항공박물관 전경
국립항공박물관 전경

 

국립항공박물관 소개

국립항공박물관은 2020년 7월 5일 김포공항 부지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항공박물관이다. 건물 디자인은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터빈 엔진을 형상화했으며 대형항공기 전시가 가능한 맞춤형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현직에서 물러난 조종사, 관제사, 승무원, 정비사 같은 항공 전문가가 전시 해설을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 박물관의 자랑이다. 전시는 총 3층으로 1층은 세계 항공역사관과 우리나라 항공역사관, 2층은 항공산업관, 3층은 항공생활관으로 구성돼있다. 4층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김포공항에서 이착륙하는 항공기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 기획뿐만 아니라 항공 꿈나무를 위한 열린 교육 및 체험시설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블랙이글스 탑승체험, 조종관제체험, 기내훈련체험, 항공레포츠 체험, 어린이공항체험 등 박물관의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항공문화를 친근하게 느끼도록 돕고 있다. 박물관장으로서 아무래도 학예사 업무만 보던 시절보다 회계, 인사 같은 경영까지 신경써야할 부분이 많다. 신생박물관이고,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불안정한 측면이 있다. 어서 안정적인 업무환경을 갖추고 많은 국민들에게 우리 항공기술과 문화를 알리는 박물관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항공박물관에 전시된 퇴역 비행기의 모습

 

꿈보다는 취업걱정이 앞섰던 시절

민속학과 진학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고향이 안동이었고 집안의 어려움 등 선택지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진로를 알아보다가 학예사라는 직업을 처음 알았다. 입학부터 군입대 전까지 2년 동안은 탈반덧뵈기 동아리 활동을 했다. 훈련부장까지 맡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연병장에 모여서 훈련하고, 방학마다 전수도 갔다. 전수를 가면 비닐하우스나 시골집에서 자기도 하고 참 열악했다. 그래도 당시에 인기가 참 좋았다.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축제에 초청받아서 공연을 가기도 했고, 기업 워크숍 공연에도 초청받았다. 안동 인근의 풍산장, 점촌장 같은 시장을 돌며 유랑공연도 많이 다녔다.    

전역하고 학교에 돌아와서는 전력으로 민속을 공부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공부를 하다 보니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해봤는데 영 체질에 맞지 않아서 금방 포기했다. 3,4학년 때는 학과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교수님들 밑에서 마을 현장답사를 가보고 석사 선배들의 논문 연구를 돕기도 하며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때 친구들과 모여 우리민속연구반이라는 학과 소모임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학부생들이 모여서 학회에서 논의된 논문을 윤독하고, 자체적으로 영덕군 백석리의 어느 마을을 정해서 우리만의 민속지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당시 멤버들이 교수님이 하시는 다른 연구 작업에 바로 투입되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놀기도 참 많이 놀았다. 졸업 후 곧바로 민속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교수님들께서 아주 혹독하게 지도해주셨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은 전부 이때 쌓은 것 같다. 그때 대학원 인기가 굉장히 좋았다. 학부 출신은 물론이고 풍물 치시던 분, 민요 부르시던 분처럼 현장에 계시다가 대학원에 온 분들이 많아서 그분들을 보며 많이 배우기도 했다.      

 

직접 고안한 옛길 박물관과 찻사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문경시 학예사 채용시험에 지원했다. 운이 좋게 바로 합격해 문경새재 박물관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문경새재는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장으로 큰 인기를 얻은 관광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물관은 관광객들에게 외면 받는 곳이었다. 명색은 박물관이지만 향토사 중심으로 꾸며져 지역의 홍보관, 향토 사료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문경 지역 특성에 맞춘 박물관 리모델링안을 기획했다. 그때가 2006년인데 한국에서 걷는 여행, 트레킹 붐이 불었다. 세계적으로도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 구마노고도 순례길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무렵이었다. 문경새재 역시 조선시대 고갯길의 대명사로 문경의 역사적 정체성을 잘 나타내는 곳이자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길로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여러모로 ‘길’ 박물관을 만들기 제격이었다. 기획부터 자료수집까지 주도적으로 리모델링을 진행한 끝에 2009년 문경 옛길 박물관으로 재개관에 성공했다.    

문경시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찻사발’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문경은 전통적으로 도자기가 유명해 김정옥, 천한봉 사기장 같은 분들은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이분들이 주력하는 일이 차를 마실 때 쓰는 도자기, 일명 다완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문경 도자기는 일본의 다도(茶道)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문경 도자기 명장들이 일본에서 1년에 몇 번씩 전시회를 열었고, 개인 수공업 도자기 수출로만 동탑산업훈장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박물관에 와서 이 도자기를 보니 ‘도도야 다완’, ‘이라보 다완’ 이렇게 이름표가 붙어있더라. 앞에 붙은 ‘이라보’ 같은 표현은 일본 다도문화가 만든 나름의 표현이라 하더라도 일본식 용어인 다완은 우리말로 바꿔야한다고 생각했다. 찻잔, 찻사발 같은 우리말 표현을 두고 고민하며 국립국어원에 문의했다. 찻사발이라는 표현이 성립되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그 이후 문경시에서도 쭉 찻사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문경을 떠나 창공으로 이륙하다

한 곳에서 15년 넘게 근무하다보니 어떤 도전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라. 여기서 안주하기보다는 삶의 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다. 계속 학예사 업무에만 집중하기보다는 큰 박물관의 관장으로서 경영 업무를 맡아보고 싶었다. 당시 관장을 맡고 있던 문경 옛길 박물관은 직원 10명 안팎의 작은 규모였다. 결국 2014년 문경을 떠나 공군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그 자리가 5년 임기제였는데 사실 문경에 있을 때는 일반직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됐다. 어쩌면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문경에 있을 때보다 제법 큰 규모의 박물관 경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공군박물관 업무는 굉장히 재밌었다.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긴 기분이었다. 매일 책과 도자기처럼 작은 유물만 다루다가 실내에 보관하기도 어려운 커다란 비행기를 다루게 됐다. 공군박물관에 가면 실제 공군에서 사용했던 퇴역 비행기 수십 대가 늘어서있다. 이런 퇴역기들은 문화재가 되거나 교육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전에 공군과 별다른 인연도 없었고 군 박물관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낯설기도 했지만 바뀐 업무가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전혀 없었다. 문화재를 모으고, 관리하고, 연구하고,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업무는 여느 박물관과 똑같다. 겉으로 보면 공군박물관이 단순히 전투기만 다루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6.25전쟁에서 활약한 무스탕 전투기가 있다. 여기에는 전쟁 발발 직후 전투기 한 대 없던 조국을 위해 급히 일본에 건너가서 미군 전투기를 인수해온 조종사들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있다. 고작 일주일 훈련 후에 실전에 투입된 조종사들은 성조기 도색 위에 태극무늬를 덧칠한 뒤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누볐다. 중요한 것은 금속으로 만든 기체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금 근무하는 항공박물관도 마찬가지다. 비행기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비행기 한 대에는 기장, 승무원, 정비사, 관제사 등 많은 사람의 노력과 여행객의 설렘까지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있다.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바로 민속학이 제일 잘하는 일 아니겠나.

 

최고의 전시는 바로 다음 전시

내가 기획한 최고의 전시를 묻는다면 ‘다음 전시’라고 말하겠다. 학예사로 살아온 20년 이상의 경험을 담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항상 지금 전시에 최선을 다했지만 늘 전시를 하고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예산이 부족했다’, ‘인력이 부족했다’ 같은 핑계를 찾기도 한다. 관람객이나 언론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스스로 아쉬운 적도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관장이 전시의 모든 부분을 계획하진 못하겠지만 우리 박물관 전시팀과 함께 정말 좋은 전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과분한 직책을 맡아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초반에 말한 것처럼 학예사 업무를 넘어 포괄적으로 조직을 관리하는 안목을 길러야하는 입장이다. 스스로 어떤 리더라고 평가하긴 이르지만 조직의 화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갖추려고 한다.

 

도전하라, 부딪쳐라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할 입장이 맞는지 조금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우리 때에 비해 길이 많이 좁아지고,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환경에 처한 것 같다. 그렇지만 후배들이 좀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부딪치고 도전해야한다. 벽이 있다면 먼저 부딪쳐 봐야 넘을 수 있다.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코 그 벽을 넘을 수 없다. 기초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너무 무의미하게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듣는 전공수업 하나, 레포트 한편이 쌓여서 분명 의미 있는 결과를 낼 것이다. 차근차근 기초를 쌓아 자신만의 특색을 드러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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