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으로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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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으로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다
  • 이철승
  • 승인 2021.11.16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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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끌려 시작하게 된 문화산업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기획자로 성장
후배 성장 돕는 ‘황금인맥’ 되고 싶어

자랑스러운 솔뫼인을 찾아 <67> 아름다운 여행사 대표, 류필기(체육·97) 동문 

 

스토리텔러라는 직업을 아는가, 어떤 내용을 재미있게 꾸며 전달하는 사람이다. 류필기 동문은 명실상부 안동 최고의 스토리텔러다. 안동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전통문화를 맛깔나게 소개한다. 최근에는 해외까지 우리의 멋을 알리는 문화외교관 역할까지 수행하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행사 대표와 하회별신굿 탈놀이 이수자로도 동분서주 하고 있다. 맨주먹 정신으로 안동 촌놈에서 자랑스러운 한류 전도사로 거듭난 류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컴퓨터를 못 해 시작된 전통문화와 인연

고등학교 때 서클활동 시간이 있었다. 첫 시간에 서클을 정하는데 서클 명단을 쭉 보여주고 가고 싶은 서클을 호명하면 희망자는 손을 드는 방식이었다. 테니스반, 서예반, 한문반 등 여러 서클이 있었고 내가 가고 싶은 서클은 컴퓨터반이었다. 컴퓨터반 차례를 기다리다 손을 들었는데 나 말고도 열두 명이 손을 들었다. 너무 많으니까 선생님이 “컴퓨터 안 해본 사람은 전부 손 내려라” 하셨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가 집에 잘 없던 시기니까 나도 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자리가 남는 민속반에 떠밀려 들어가게 됐다. 그때만 해도 전통문화 덕에 인생이 이렇게 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보니 전교회장, 선도부장 선배가 다 민속반이었다. ‘이야, 멋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 따라다니면서 많이 보고 배웠다. 하회마을 가서 탈춤 전수도 받고 전국대회 동상도 타고 참 재미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학창 시절 육상, 격투기, 탈춤까지 주로 운동을 많이 했다. 오토바이도 타보고 워낙 놀기도 좋아해서 공부는 잘 못 했다. 그러던 중 체육선생님께서 “대학을 나와야 인간이 된다”며 붙잡으셨고 “알겠습니다”하고 본격적으로 체대 입시를 준비했다. 경성대와 안동대 두 곳에 합격했는데 등록금도 저렴하고 고향에 있는 안동대를 선택했다. 당시에 안동대 체육학과 예비 2번을 받았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2가 아니라 20이었다. 그대로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예비 20번까지 기회가 왔다. 그때가 1997년이라 입학하자마자 IMF가 터져버렸다. 한 학기 만에 휴학을 신청하고 술집, 배달, 이벤트업 가릴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가 어려울 때 군대라도 빨리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듬해 입대를 결심했다. 2000년 5월 제대 후 고등학교 때 기억을 살려 탈춤을 다시 시작했다. 또 여행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당시 문화산업으로 먼저 자리를 잡았던 임재선 선배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고등학교 서클 시절부터 같이한 한 살 많은 형인데 내게 “우리가 문화판 한번 제대로 바꿔보자” 하셨다. 덕분에 문화산업, 관광업에 발을 들인 계기가 됐다. 그런데 바로 문화계로 진로를 확정 지은 건 아니고 체육교육대학원까지 갔다. 그때 한참 체육 교사를 많이 뽑는다는 말이 있어 기왕 전공한 김에 석사까지 따버리자는 생각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여전히 낮에는 여행사 일하고 공연하고 주말에는 탈춤도 췄다. 막상 대학원을 나와서는 내가 아직 누군가를 가르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교사의 길을 걷진 않았다.    

이야기꾼의 면모를 뽐내다            

대학 시절 MBC 라디오 프로그램 ‘사투리 사냥’에 출연했다. 예를 들어 여성 출연자가 “오빠, 보고 싶어요” 하면 내가 사투리로 “에헤이 쪼매만 있음 내가 델꼬 갈낀데” 하고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촌스럽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재미있다고 해주는 사람도 많고 굉장히 인기였다. 6개월 정도 진행하고 프로그램이 개편돼 이후에는 코미디언 표영호 씨가 진행하는 ‘감칠맛’의 출연자로 1년 정도 사투리 입담을 뽐냈다. 비슷한 시기에 스토리텔링 공연도 시작했다. 공연지역에 따라 경주는 김유신 장군, 청송은 소헌왕후, 서천은 목은 이색 등 공연마다 항상 그 지역의 문화재를 활용해 역사적 배경과 위인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스토리텔러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이다.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시대상황도 알아야 하고, 마치 역사 속 인물이 된 느낌으로 말해야 한다. 오묘하게 인물의 감정을 살려서 관객들이 정말 그 위인을 만난 것처럼 느끼도록 말이다. 역사 속 인물의 삶이 주는 교훈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퇴계 선생은 한 번도 부인에게 하대하지 않았고 천민 대장장이에게도 공부를 가르쳐주셨다. 퇴계 선생의 경(공경)사상과 평등사상은 현대인들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사드 보복을 넘어 한류를 알리다

여행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부터 일본, 중국, 러시아, 필리핀, 홍콩, 태국 등 웬만한 나라들은 다 가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해외공연을 시작한 시기는 2016년이다. 그때 사드 문제 때문에 중국과 교류가 완전히 중단돼 버렸다. 문화교류 목적으로 100명 이상 모이는 행사를 기획했다가는 법정 구속 6개월 행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있는 공무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필기야, 진짜 좋은 기회가 있으니까 무조건 공연 하나만 하자.” 그러면서도 잘못하면 감방 갈 확률이 80%라고 했다. 호기롭게 “그래 가자, 문화로 일 한번 내보자” 하는 생각으로 중국 산둥성 옌타이(연태)시로 떠났다. 공연 기획과 연출을 맡아 유명 가수부터 국악 연주자까지 섭외하고 안동시에 부탁해 권영세 시장의 축사와 태극기 300개를 협찬 받았다. 야심차게 준비했지만 아내와 세 살 먹은 아이가 있는 몸인데 솔직히 가슴이 떨렸다. 진짜 구속되면 시장님이나 아는 의원님이라도 탄원서 한 장 써주지 않을까 싶어 무작정 저질렀다. 막상 공연을 진행하니 2,000석이 매진되고 현지 한인과 중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공무원 친구가 처음 얘기한대로 문화교류 공로 표창까지 받았다. 공연이 잘 풀린 덕분에 옌타이시를 비롯한 중국 공무원들과도 인맥을 쌓았다. 2017년 초에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공연이 취소될 정도로 한중 분위기가 여전히 냉랭했다. 그럼에도 앞서 쌓아둔 인맥들 덕분에 이후에도 여러 번 한중 우호음악회를 개최했다. 중국 당국에서 웬 공연이냐고 단속을 나왔다가도 류필기 선생 공연이라고 하면 “알아서 잘 해주고 이따 밥이나 먹자고 해” 하면서 협조해줬다.    

이 일을 계기로 2018년에는 옌타이시에 안동 홍보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산시와 옌타이시의 한중 유소년 축구 교류를 주선하고 의성군을 연결해 중국 수출설명회가 열리기도 했다.                

방시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날

2019년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그간 스토리텔러 활동과 해외교류 노력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게 BTS 방시혁 대표가 받은 것과 똑같은 상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떨떨하다. 표창 심사를 4차에 걸쳐 받았는데 어떤 상인지도 잘 모르고 장관상 정도 받는 것 아닐까 기대했다. 3차까지 통과했을 무렵에 문화체육관광부라면서 전화가 왔는데 “선생님께 대통령 표창 수여하게 됐는데 상금 있으니까 계좌번호와 주민등록번호 좀 알려주십쇼”라고 했다. 당연히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확 끊어버렸다. 그런데 계속 전화가 와서 확인해보니까 진짜 문체부 관계자였다. 한 달 뒤 시상까지 가족한테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언론 발표 이후에야 아내에게 말했는데 전혀 못 믿다가 시상식 안내 메일을 보여주니까 그제야 깜짝 놀랐다. 아무튼 정말 영광스러웠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준 아내와 육아를 도맡아주신 장모님, 스토리텔러로 키워주신 김준한 전 경북콘텐츠진흥원장님께 감사드린다.      

맨주먹으로 일궈낸 황금인맥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처음에는 힘들었다. 많은 문화·예술계 후배들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 실력과 열정이 있어도 이미 지역에서 자리 잡은 선배들에게 밀려 좀처럼 무대에 서지 못한다. 공연실력에 대한 의구심과 편견 탓에 안동에서 잘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타 지역 행사, 해외행사가 더 활로를 뚫기 쉬웠다. 경주, 청송 등 주변 지역 행사에 자주 참여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선배들이 좀 더 이끌어주고, 적극적으로 공연 기회를 잡아주면 후배들이 빠르게 성장해서 전국적인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체계가 없어서 안타깝다.    

내 방식은 ‘일단 저지르고 보자’였다. 공연 기회가 보이면 무작정 편지도 보내고 SNS로 연락도 보냈다. 교황님 방한에 맞춰 편지를 쓴 적도 있다. ‘교황님, 한국에 오시기 전에 예의를 갖춰서 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하고 바티칸에서 공연 한번 선보여 드려도 되겠느냐고 여쭤봤다. 일주일 정도 후에 답이 왔다. 너무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다고 하시더라. 결론적으로 교황청 공연이 성사되진 못했지만 매번 이렇게 공연을 잡고 성장해왔다.     그 외에도 일면식 없는 안동 출신 선배님들께도 편지와 선물을 보내보고 페이스북으로 여러 나라 한인회장님들과 연락을 시도해 실제로 공연을 성사시킨 사례도 여럿 있다. 후배들에게 성공한 선배, 돈 많은 선배보다는 황금인맥을 가진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 내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수년간 쌓아올린 인맥으로 실력과 열정이 있어도 빛을 못 보는 후배들을 무대에 세우고 더 키워주고 싶다. 공연뿐만 아니라 특산물도 마찬가지다. 정말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도 판로가 없고 홍보가 부족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행사때마다 안동소주를 소개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공연으로 일궈낸 인맥을 좋은 곳에 더 널리 활용하고 싶다.

류 동문의 사무실 한켠을 장식한 문화교류의 흔적 

 

그의 뿌리 하회별신굿 탈놀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나를 소개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하회별신굿 탈놀이다. 요즘도 하회마을에서 주지, 백정 배역을 맡아 공연한다. 학생 시절에 탈춤을 출 때는 몰랐는데 요즘은 부쩍 사명감이 느껴진다. 근래에 전수자가 들어오지 않아 대가 끊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문화의 전통을 잇는다는 사명뿐만 아니라 탈춤이 지금의 나를 키워준 뿌리라고 느낀다. 스토리텔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넉살좋게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탈춤으로 키운 공연경험 덕분이다.    

그가 꿈꾸는 일

코로나19도 끝이 보이는 요즘에는 어떻게 하면 안동에 외국인 관광을 유치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나는 축제와 연계한 ‘엔터투어’다. 경북만 해도 23개 시 군이 매달 큰돈을 들여 축제를 벌인다. 이 일정에 맞춰서 3박 4일짜리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패키지 여행을 기획한다면 관광객도 지자체도 모두 기분 좋은 일이 될 거 같다.

다른 하나는 지친 청년들을 위한 무료 ‘힐링투어’다.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는 청년을 모집해 간고등어 공장에서 일도 해보고 밤에는 월영교로 데려가 풍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통해 삶의 가치를 다시 알려주고 싶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일단 겁먹지 마라. 어떤 상황이던 실수 할 수 있다. 실수 한 번에 위축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안동대에 온 것에 지방대라는 패배의식을 갖는 친구들이 있다.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한다. 서울과 다르게 안동에는 선배가 후배를 끈끈하게 이끌어주는 문화가 있다. 스토리텔러로 성장한 방법처럼 지역 문화재의 활용방안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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