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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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 이철승
  • 승인 2021.11.16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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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눈치 보기 급급해 보여
간판만 갈아치우면 능사인가

안동에 사는 농장주 A 씨는 지난해 처참한 경험을 했다. 수확한 호박 1,000박스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팔린 건 729박스뿐이었다. A 씨는 눈물을 머금고 내년에는 꼭 호박을 다 팔고 마리라 다짐한다. 연초부터 이웃집은 어떤 농사를 짓는지 둘러도 보고 비싼 돈 주고 전문가에게 품종 상담도 받았다. 듣자 하니 요새는 호박보다는 수박, 포도 같은 과일이 수요가 많단다. 어떤 집은 품종 개량에 성공해서 샤인머스캣이나 애플수박으로 대박을 냈단다. 게다가 시장수요에 맞춰서 저런 교배종 재배를 시도하면 국가에서도 지원금을 준단다.  

자극을 받은 A 씨는 의욕 넘치는 새 판 짜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장 호박밭을 전부 갈아엎을 수는 없는 노릇, 최근 3년 동안 수확량이 가장 적었던 농지부터 포도밭으로 개간에 들어갔다. A 씨 밑에서 호박을 재배하던 소작농들은 졸지에 일자리를 잃거나 포도를 키워야하는 신세가 됐다. 일부 남아있는 호박은 전부 줄을 그어 최대한 수박처럼 보이도록 했다. 호박밭을 밀어낸 자리는 과수원으로 탈바꿈을 결심했지만 하루아침에 샤인머스캣 같은 개량품종을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A 씨는 결국 아무 청포도 나무를 가져다 심은 후 00머스캣이라며 최대한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홍보한다.

호박이 안 팔리면 호박의 영양가나 높이려고 연구하거나 호박이 잘 팔리도록 홍보에 나서는 게 순서고 상식 아닐까. 생전 호박농사만 짓던 사람이 남들 다 한다고 과수원 흉내 내면 잘 될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호박에 줄을 그어 팔아보겠다는 유치한 술수는 또 뭔가.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다. 자본도, 경험도, 노하우도, 근본도 없는 농사가 여기 있다. 결국 올해 농사 조짐도 좋지 않다. 예약판매를 마무리했지만 다른 농장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작년보다도 낮은 예약률을 기록한 A 씨의 농장이다.

 

허무맹랑하고 맥락 없는 이야기이나 우리대학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인기가 떨어지는 학과를 밀어내고 당장의 취업률에만 근거해 학사구조를 재편하고 있으며 명확한 특성화 방향 없이 바이오헬스니 AI니 온갖 듣기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고 있다. 차마 밀어내지 못한 호박밭 같은 인문대에는 학생에게 장학금까지 쥐어주며 공학을 배우도록 유도한다. 비전공자를 위한 체계적인 커리큘럼도 없어 생전 처음 보는 코딩의 늪에서 허우적대기 일쑤다. 그야말로 인문대라는 호박에 공학교육이라는 어설픈 줄긋기다.  

어설픈 줄긋기는 또 있다. 바로 성급한 간판 갈아치우기다. 교명부터 바뀐다. 이젠 ‘국립’안동대학교다. 그동안 수험생들이 우리대학이 사립인 줄 알고 지원을 안 했던 모양이다. 학과 이름도 갈아치운다. 본 기자가 소속된 민속학과 또한 저조한 신입생 충원으로 그 대상이 됐다. 재학생에게는 학과명 변경을 원하는지, 혹은 어떤 이름으로 변경을 원하는지 의견 수렴조차 없이 ‘00학과로 명칭 변경에 동의하느냐’는 설문만 진행했다. 비슷하게 짜 맞추고 이름만 그럴싸하게 붙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교수, 학생, 시설, 교과목 전부 그대로인 상태에서 급하게 간판만 갈아치운다고 신입생이 몰려들까. 수험생은 바보가 아니다.  

융합이나 특성화니 외치는 대학의 정책이 하나같이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부실대 낙인을 피하기 위한 요식행위로만 비칠 뿐, 정말 지역발전과 학생역량 강화를 위한 청사진이 얼마나 준비됐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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