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그 100년의 발자취를 찾아서
상태바
3.1운동, 그 100년의 발자취를 찾아서
  • 류재민 기자
  • 승인 2019.06.03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의 해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해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강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학살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 이에 우리 민족은 19193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지식인은 물론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에서 항일독립운동에 스스로 참여하게 된다.

경상북도 안동, 포항, 구미, 경주 등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경북 지역의 한말 항일의병은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고 장기간에 걸쳐 전개됐다.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은 경북 안동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201812월 기준으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인원은 전국 15,180. 이 중에서 경북인이 2,201(대구 102명 포함)으로 가장 많다. 특히 안동은 전국 시·군 단위에서 독립유공자(포상자)가 서울 404명에 이어 368명이며, 미포상자 668명을 포함하면 1,036명이나 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안동 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석주 이상룡 선생을, 경북 영양 출신이자 여성독립운동가인 남자현 의사를 살펴보자.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겠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통합의 정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인물이다.

이상룡 선생은 의병항쟁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으로 발을 내디뎠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모든 재산을 팔아 이듬해 1월에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나이는 54세 였으며, 재산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꽤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망명한 그는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서로군정서를 이끌었고,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랐고, 그렇게 총 21년 동안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우리대학 김희곤 사학과 교수는 석주 선생뿐만 아니라, 석주 선생의 부인이나 딸, 며느리 희생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이다고 말했다.

한편 경상북도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아들, 손자 등의 가족과 임청각을 둘러싼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의 치열한 삶을 총 50회 분량으로 제작해 방송할 예정이다.

 

끊을 수 없는 정기, 임청각

안동시 법흥동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보물 제182)이 자리 잡고 있다. 혹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의 집이 일본군에 의해 무너지고 그 위로 철길이 깔리는 장면을 본 적 있는가? 이는 임청각을 모티브로 한 장면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임청각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등장하자, 정기를 끊기 위해 집 한가운데에 철길을 뚫었다.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 건물 중 대문과 행랑채 일부가 철거돼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은 왕산 허위, 백하 김대락, 우당 이회영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로 선생을 포함한 10명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3·1운동 당시 안동에서는 맨 먼저 만세 운동을 전개한 동생 이상동과 끈질긴 변절 요구에 자결한 아들 이준형 그리고 손자와 조카들이 모두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다.

한편 현 정부는 석주 선생의 생가 복원 정비 종합 계획을 수립해 임청각 정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달 25일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청각 대문에 독립유공자 명패가 달렸다. 이는 안동지역 독립유공자 수권 유족 68명 중 먼저 임청각에 명패를 달고 존경과 예우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이광열(옥야동·64) 씨는 임청각을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복원 중인 임청각처럼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통일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유관순 열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독립군의 어머니혹은 여자 안중근이라 불렸던 남자현(1872~1933) 의사도 있다. 우리에게 생소한 분일 수 있으나,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모티브라고 하면 어느 정도 연상될 것이다.

남자현 의사는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했다. 남자현의 남편은 명성황후시해사건 당시 의병 활동을 했고 전투 중 사망했다. 그렇게 임신 중이었던 남자현은 과부가 됐다.

19193·1운동 때 중국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독립군 부대)에서 활약하는 한편,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해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그는 우수한 사격 실력의 보유자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수원대학교 박환 사학과 교수는 실제로 남자현 의사는 총을 잘 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925,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장단체 통합과 군자금 조달, 안창호 선생 석방 운동 등에 앞장서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첫 번째 암살이 실패한 후, 1932년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손가락을 잘라 조사단에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일은 유명하다. 그는 1933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를 암살하기 위해 하얼빈에 숨어들었다가 체포된 후 원수의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투쟁을 하다 15일 만에 61세로 숨을 거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남자현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했고, 돌아가신 후엔 24세가 된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

1919년에 아들과 만주로 망명해, 아들은 신흥무관학교에, 어머니는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했다. 비록 두 번의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녀가 보여준 그 의지는 훗날 독립운동에 큰 발화점이 됐다. 김 교수는 후손들이 남자현 같은 독립운동가를 알리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시대의 숨은 영웅들을 발굴해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숨은 조력자

남자현 의사 외에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전체 독립유공자 15,180명 가운데 여성이 357명으로 2.4% 정도이지만, 숙식을 제공하고 독립군 군복·화약을 만들고 도피자를 숨겨주거나 자금을 모으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여성들도 많았다. 그동안 우리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활약상에 비해 저조한 편이다. 그러나 최근 정부는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박 교수는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시급하다잊힌 영웅들과 후손들에 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류재민 기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