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솔뫼문화상_소설 가작 '오로지, 나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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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솔뫼문화상_소설 가작 '오로지, 나만의...'
  • 안동대학교 신문사
  • 승인 2023.12.0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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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나만의…….>

 박수연(국어국문 22)

수영이란 독주다. 길게 뻗은 레일이 한 사람에게 주어는 수명이라면, 그 위를 헤엄치는 선수는 인생의 주인공이다. 수영과 삶의 공통점은 많다. 누구의 도움 없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 나아간다. 출발지가 같아도 다양한 요소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호각소리에 반응하는 속도, 그날의 컨디션, 갈고닦았던 실력, 선천적인 신체요건과 재능. 단언컨대 해수는 그 모든 조건에 자신이 있었다. 해수에게 일등은 언제나 약속된 것이었다. 몇 달 전부터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기 전 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투명하게 천장을 비추던 물이 세차게 요동친다. 해수는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애써 밀어낸 물살이 해수의 다리를 사정없이 옭아맸다. 최선을 다해 팔을 휘저었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추락한다. 50M거리의 벽을 찍고 몸을 돌렸을 때, 해수의 수영은 발버둥에 가까워졌다. 지친 손끝이 가까스로 결승선에 닿자마자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사나운 눈초리가 해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해수는 코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수영장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해수의 코치는 전직 프로수영 선수이자, 다리 부상으로 은퇴한 후 해수의 스승을 자처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구식 DVD에 등장했던 코치의 수영실력은 감탄이 나올 만큼 뛰어났다. 한편으로 그는 운동선수의 편견을 모아서 만든 다혈질에다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

각오했던 호통소리가 수영장을 가득 메웠다. 해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해수, 요새 기고만장해졌다. 100M. 내가 초반엔 힘 빼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생존 수영해? 아니면 뒤에서 상어가 막 쫒아와?”

시도 때도 없이 윽박지르는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수는 한창 사춘기 소녀처럼 반항하지 않았다. 성적이 저조한 날의 코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았지만 말의 내용은 의외로 논리적이었다. 그래서 해수는 코치의 불같은 충고를 경청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코치의 말을 흘려듣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실력이 떨어진 원인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비판은 무력감만 키울 뿐이었다.

전자 초시계가 해수의 눈앞으로 드리워졌다. 그제야 해수는 느릿하게 기록을 확인했다. 시계 위에서 1. 09. 라는 숫자가 깜박거렸다. 허무함과 허탈함을 품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1분대는 초등학교 이후로 본 적 없는 기록이었다. 해수의 반응을 확인한 코치가 현실을 일깨워주듯이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한 달 만에 4초 늘었다. 너한텐 수영이 장난이지? 이럴 거면 그냥 취미반이나 해.”

아닙니다.”

그 이상 말을 잇는다면 울렁거림이 함께 올라올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래, 나에게 정말로 수영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에게 수영은 살아온 방식과 살아갈 방식 자체였다. 취미반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물장구나 치기위해 지금까지의 훈련을 견뎌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해수는 소리 내지 못한 반박을 속으로 되뇌었다.

해일고 합격하고 완전 빠졌네. 네가 평생 일등일줄 아니? 거기가면 너만큼 하는 애들 널리고 널렸어.”

해일고가 언급되자 해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해일고는 대한민국에서 수영으로 유명한 고등학교였다. 매년 수많은 수영선수들이 해일고를 졸업하고 명성을 펼쳤다. 해일고등학교의 입학이 확정됐을 때 해수는 무척 기뻐하며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막바지의 기록이 1분을 넘어간 지금, 해일고도 금메달도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자존심 강한 해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해수는 억울했다. 억울하고, 서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연습을 빼 먹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게으르게 굴지 않았다. 해수는 분했다. 모든 게 그 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게 해룡. 그 남자 탓이다.

 

올해 8, 악몽은 해수가 16살의 생일을 맞이한 날부터 시작됐다. 어느 때나 다름없이 훈련을 다녀온 해수는 어머니가 손수 만든 케이크를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첫 번째 꿈은 두 남녀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꿈이었다. 해수는 금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자 해룡이라는 남자의 첩이었다. 금령과 해룡은 낮부터 노을이 지기까지 바닷가를 걷다가 커다란 바위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연모하고 있소. 전생에도 후생에도 항상 함께 할 것을 약조하오.”

진심이 담긴 해룡의 고백에 금령은 붉혔다. 금령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해룡의 사랑고백을 좋아했다. 노을에 물들려진 검은 머리카락과 다부진 뒷모습을 좋아했다. 해룡의 등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것조차 좋아했다.

두 번째 꿈은 해룡이 도움을 요청하는 꿈이었다. 마을의 부자인 목손이 가난한 과부의 패물을 훔쳤는데 이를 해결할 방법을 상담하러 온 것이었다. 금령은 해룡의 고민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훔친 패물에 저주가 걸려있다고 소문을 내서 직접 돌려주게 하세요.”

금령이 내놓은 해결책에 해룡은 안도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윽고 마을에 목손이 가진 보물은 얼음처럼 차가워 졌다가 불처럼 뜨거워지며 가문을 망하게 한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과부는 물론 목손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도 자신의 몫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해수는 한동안 두 번째 꿈과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꿨다. 언제나 해룡이 먼저 금령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고 금령은 해결방법을 알려주거나 직접 해결하기도 했다. 해수가 바라본 금령은 자신보다 해룡을 위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꿈에서는 해룡의 정실부인 금선이 등장했다. 금선은 척 보기에도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룡의 첩이자 비범한 능력을 가진 해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금선은 금령의 앞에서 우아한 손길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제가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금령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해룡을 축하했다. 언뜻 태연해 보이는 금령의 반응에 금선을 삐뚜름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금령의 시종이 준비한 차에 관심을 보였다.

향기가 좋아 보입니다. 제가 대접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평소에 꺼려하는 아랫것의 일을 하려는 금선의 행동은 상당히 수상했다. 그러나 금령의 사회적 위치에서 금선을 제지할 도리는 없었다. 금선은 금령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냉큼 주전자와 찻잔을 가로채 뜨거운 물을 부었다. 물이 녹색 빛을 띠자 금선은 뜨거운 찻잔을 집어 들었다.

최근 부정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알고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이 마을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한 이가 당신이라는 소문입니다.”

이번에 금령은 미처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금령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 목적은 오로지 해룡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노력이 해룡에게 칼이 되어 돌아올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천민의 딸이 감히 수령보다 뛰어나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의도는 전혀…….”

이대로라면 해룡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의미심장한 말을 마친 금선은 차를 입속에 머금었다. 그러자 요란한 기침과 함께 금선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금령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선이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자살극을 버렸다는 결론에 도달할 즈음에는 시종들이 금령을 둘러싼 후였다.

마지막 꿈은 파도치는 절벽 위에서 금령과 해룡이 서로를 마주보는 꿈이었다. 억울하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은 금령은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금령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룡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자신의 인생은 해룡의 것이라고 선언한 다짐은 흔들리지 않았다.

해룡이 다가와 금령의 목에 큼직한 금방울을 걸어주었다. 금방울은 금령이 혼인할 때에 혼수품이었다. 나무상자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것을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금령은 그것이 이별을 위한 선물이라고 직감했다.

그대 없이 어찌 혼자 살 수 있을까요. 그대가 내 인생의 전부인 것을. 내 모든 것을 부은 이요. 내 모든 것을 드린 이라. 그대와 나의 천지가 뒤바뀌기 전부터 그대의 생 안에 날 묶어두기로 약조했음을 정녕 잊으셨나요. 금령이 흐느끼며 물었다.

이제 저를 버리시렵니까.”

그만 너를 놔주려는 것이다.”

금령의 간절함이 가슴 아려올 만큼 해룡의 답은 매정했다.

본처를 질투해 암살하려한 첩의 최후가 어떤지 알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슬플 따름입니다.”

이제 그만 해룡을 놔주어야 하는 사람은 금령이었다. 금령은 자신의 사랑이 해룡에게 저주가 되기 전에 한 발 먼저 물러섰다. 나아가 다시는 해룡과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해룡을 지우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나를 잊으시오.”

금령의 마음을 알아챈 해룡의 전언이 이어졌다. 괴롭게 얼굴을 찡그린 해룡은 애써 미소 지었다. 투박한 검집이 땅에 부딪치고 잘 비려진 검이 서글픈 금령을 비췄다. 해룡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홀가분하게 외쳤다.

한 번도 그대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

해룡이 손을 뻗어 금령을 밀어냈다. 뒤는 아득히 넓은 바다뿐이었다. 금령은 속절없이 밑으로 낙하했다. 거짓을 고하는 가을바람이 휘몰아쳤다. 금령은 눈꺼풀 안에 해룡의 얼굴을 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두 눈에서 바다보다 깊은 비애가 흘러나왔다. 전생에 용왕의 딸이었던 금령은 충분히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금령은 자신에게 몰아친 죽음을 받아드렸다. 금령을 떠민 해룡의 손보다 해룡에게 배신당한 절망이 금령을 죽였다.

금령이 죽은 꿈을 꾼 이후로 해수는 매일 같이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꿈을 꿨다. 그로인해 해수는 물 공포증을 가지게 되었다. 해수가 그토록 자신 있던 수영에서 실력을 뽐내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금령을 살해한 해룡을 원망하면서도 수영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전생인지 알 수 없는 금령을 어리석다고 평가하며 오로지 자신을 위한 삶을 살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럼에도 해수의 실력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결국 해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동안 휴식을 선언했다. 그러나 직접 수영하지 않을 뿐, 다양한 경기영상을 찾아보면서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연구해 나갔다.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날 해수는 나희경이 보내준 전국 청소년 수영대회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해수는 자신의 대회영상을 대수롭지 않게 스킵하고 중등부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전 영상을 틀었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8명의 학생들이 입수했다. 카메라의 앵글이 위에서 아래를 비추는 가운데 중앙에 있는 선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정도윤이라는 선수는 유리한 4번 레일에 있으면서도 6등으로 들어왔다. 도윤의 수영은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출발했으나 선두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추월하는 선수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수영을 즐겼다. 그 모습은 마치 인어 같아서 도윤은 레일만 푸르른 바다로 보였다. 해수는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수영이 저렇게나 즐겁다면 시답잖은 악몽으로 인해 물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화면속의 남자를 본받기로 한 해수는 오랜만에 수영가방을 꾸렸다.

 

중학교 마지막의 겨울방학은 빠르게 지나가고 입학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해수는 어머니가 다려준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치마와 조끼를 입었다. 중학교 교복에는 없었던 넥타이까지 메니 제법 고등학생다웠다. 아직 나뭇가지가 앙상한 초봄이었지만, 해수의 마음은 자신감과 목표들로 풍성했다.

훌륭한 수영선수들을 잔뜩 배출한 해일 고등학교답게 개학식 후 첫 수업은 체육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학교 내부에 위치한 수영장으로 향했다. 해수는 구석에서 조용히 몸을 풀었다. 그때, 누군가가 해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수가 뒤를 돌아보자 어딘가 익숙한 남학생이 말갛게 웃고 있었다.

안녕. 남해수 선수지? 경기영상 잘 보고 있어. 정말 대단하더라.”

정도윤?”

해수가 인사말 대신 그의 이름을 되물었다. 도윤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갈무리하고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날 알고 있었구나. 영광인데. 너와 만난 적이 있다면 내가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 같고, 혹시 너도 내 경기 봤어?”

그래.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더라.”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다소 씁쓸하게 느껴지는 도윤의 대답에 해수는 자신의 말이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수는 기분이 상했을 도윤을 위해 들키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사정까지 말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그동안 악몽 때문에 수영실력이 많이 떨어졌었어. 근데 네 영상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어. 수영이 좋아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그렇구나. 내 영상이 동기부여가 됐다니 다행이야. 나도 네 경기 보면서 자극받고 있어.”

멀리서 집합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도윤은 해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선생님을 모른척할 만큼의 배짱은 없었다. 도윤이 등을 보이자 동시에 해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해수는 분명히 보았다. 도윤의 등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

해수의 기억위에 무의식적으로 펼쳐놓았던 장막이 거쳤다. 흐릿했던 해룡의 얼굴이 도윤의 얼굴과 선명히 겹쳐졌다. 찰나에 해수는 그동안의 꿈이 단순한 몽상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해수와 금령이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 아주 먼 과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슬픔을 토하고 마지막에는 분노하며 저주를 퍼붓던…….

아니 저주를 했었나? 혼란스러워하는 해수의 눈동자가 도윤을 응시했다. 금령이 죽어가면서 해룡을 증오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금령은 절망과 체념을 할 수 있었지만 해룡을 향해 분노할 줄 몰랐다. 하지만 해수는 달랐다. 금령을 죽이고 꿈속에서도 자신을 괴롭힌 해룡에게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도윤에게 분노했다.

도윤과 만난후로 부터 해수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 사실이 도윤과 해룡이 같은 인물이라는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도윤과 마주하기 싫었지만 해일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전학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수는 망설임이 가득한 손길로 교실 문을 열었다. 한창 친구 사귀기에 열중인 아이들 사이에서 도윤의 손이 흔들렸다. 이를 외면한 해수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책가방을 풀었다. 도윤이 그런 해수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해수야. 어제 너랑 이야기 더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엄청 놀랐어.”

일이 있었어.”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혹이 나랑 같이 수영 동아리 할 생각 있어? 넌 잘하니까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도윤은 존경과 호기심이 뒤섞인 해룡의 눈동자를 가지고, 해룡과 똑같이 다정한 도움을 청했다. 홍수가 났을 때도, 과거 급제에 실패 했을 때도, 욕심 많은 양반이 사고를 쳤을 때도 해룡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사람은 금령이었다. 그러나 부와 명성은 모두 해룡의 차지였다. 반대로 금령의 인생은 능력을 부정당하는 불합리로 넘쳤다. 만약, 해룡이 진실로 금령을 사랑했다면 금령이 죽게 내벼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해수의 꿈속 금령은 해룡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금령의 희생은 강요일 뿐이며 사랑은 현실을 잊기 위한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한 해수는 속이 불에 달군 듯이 뜨거워졌다.

싫어. 내가 왜?”

다소 높은 언성의 거절이 교실에 퍼졌다. 학생들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해수와 도윤에게 집중했다. 해수가 멋대로 만들어낸 살벌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도윤이 멋쩍게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도윤의 천진함이 해수를 미치게 했다. 해수의 영혼은 도윤과 해룡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긍정하고 있지만, 이성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령을 살해한 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도윤을 책망해 봤자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수는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금령처럼 자신의 삶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해수는 금령이 될까봐 두려웠다.

난 아무도 도와주기 싫어. 내 인생이잖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 거라고!”

해수의 외침은 갈수록 절박해 졌다. 이것은 해룡을 향한 저주의 말이었고, 금령에게 건네는 충고였으며, 도윤에게 전하는 선언이었다. 이타적인 삶이 얼마나 끔직한 최후를 맞이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기대하던 고등학교의 첫 봄은 도윤과 재회로 끔찍해졌다. 그 봄을 다잡고, 다독이고 나서야 여름이 찾아왔다. 해일고등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아 여름합숙에 들어갔다. 해일고등학교의 여름합숙은 프로 수영선수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수영하며 실력을 향상시키자는 취지의 연례 행사였다. 장소가 부산으로 결정되자 학생들은 바다에서 수영할 생각에 환호성을 질렀다.

해일고등학교의 간판을 단 관광버스가 해운대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달음박질하며 버스를 빠져나왔다. 코치들은 수영에 자신 있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기 위해 악전고투했다.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해수는 칙칙한 남색 수영복 대신에 바다와 잘 어울리는 연두색 수영복을 걸쳤다. 수영을 할 때 비효율적인 프릴과 리본이 어울리는 날씨였다. 어디선가 짭조름한 실바람이 불어왔다. 해수는 바람에 이끌려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도윤이 한 서퍼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도윤은 서퍼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생전 처음 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관찰했다. 화려한 디자인의 서핑 보드가 도윤의 눈길을 끌었다. 도윤은 사람의 몸길이만큼 기다란 물체에 매료되고 말았다. 물 위에서 자유롭게 파도를 타는 행위는 물속에서 경쟁만 해왔던 도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부터 도윤은 잔잔한 수영장보다 거친 파도를 동경해왔다.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을 앞에 두고 호기롭게 나아가고 싶었다. 도윤이 갈망하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 관심 있어? 한 번 타볼래?”

아직 풋풋한 아이의 열망을 알아챈 서퍼가 먼저 도윤에게 말을 걸었다. 도윤은 긍정하면 실례인줄 알았기에 침묵했다. 도윤의 심정을 이해한 서퍼는 같은 질문을 하기보다 먼저 리쉬를 건넸다. 도윤은 못이기는 척 리쉬를 받아들었지만, 아직은 낡은 망설임과 어색한 설렘으로 넘실거렸다. 자신의 선택이 수영선수로서 쌓아왔던 노력들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 촌스러운 구명조끼는 벗자. 바다가 무서워서야 바다랑 싸울 수 있겠어?”

서퍼의 한 마디가 도윤의 세상을 넓혔다. 당장의 두려움을 이겨낸다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느꼈다. 도윤은 구명조끼를 벗어던지고 보드를 잡았다. 도윤은 오랜 시간동안 바다와 함께 살았던 사람처럼 물 위를 유영했다. 첫 도전을 시험해 보기에 알맞은 파도를 만나기 위해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무모하다는 이성은 이미 버려둔 채였다. 이윽고 거대한 파도가 성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도윤을 반기기보다 원망하듯이, 파도는 질책과 타박이 담긴 손을 장엄히 휘둘렀다. 도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드려야 했다.

물줄기가 공중으로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어쩐지 그리운 목소리가 먹먹하게 흘러들어왔다. 금령도 이렇게 두려웠겠구나. 나에게 구해질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애써 지우고 고독하게 떠났겠구나. 기억하지 못하는 후회가 도윤의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도윤은 머릿속을 아득히 매우는 여성의 미소가, 눈물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천천히 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제도 모르는 부탁을 했던 그날, 해수의 눈동자에 뚜렷이 빛났던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도윤은 그만 딱, 이대로 죽고 싶어졌다.

가녀린 손이 멋대로 바다를 파고들어 도윤의 팔을 붙들었다. 도윤은 누구보다 강한 영웅에게 매달리듯 구원의 손길을 마주잡았다. 작은 물거품이 일고, 해수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물 밖으로 나와 보드에 몸을 맡겼다. 강렬한 색깔의 보드 위로 바닷물과 섞인 도윤의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도윤의 상태를 확인한 해수가 입을 열었다.

뭐야, 그렇게 무서웠어?”

나에게 푸르렀던 바다는 너에겐 암흑과 같았구나.”

도윤의 발성과 말투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챈 해수가 표정을 굳혔다.

미안하오. 금령. 다 내 잘못이오. 다 내가 못된 탓이오.”

연거푸 이어지는 사과는 머지않아 탈진할 정도로 이어졌다. 해수는 그만하라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하지 많았다. 그것은 분명 금령이 받아야 마땅한 사죄였다. 해룡의 행동에는 그 어떠한 변명도 필요 없는 죄가 있었다. 해수가 사랑하는 바다는 위로하듯 턱 끝을 간질이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하염없이 용서를 구하고, 해수는 조금 물러서서 생각했다. 금령이라면 해룡의 모든 죄와 죄책감까지 기꺼이 품을 것이라. 해수는 도윤이 뉘우칠 기회를 주고 자신 또한 빛바래버린 추억을 회상했다.

 

합숙이 끝나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해수는 이번 8월 말에 개최될 국제 스포츠 대회 심사에 참여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때문에 도윤은 여름방학과 더불어 개인 코칭을 받는 해수와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해수가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석하게 된다면 자신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 것만 같았다. 그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어서 몇날며칠 밤을 지새웠다. 처음에는 어째서 해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자신은 이렇게나 답답한데 어째서 해수는 괜찮아 보이는지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도윤의 모든 꿈에서 해룡의 기억이 돌아왔을 때, 해수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도윤은 카톡으로 해수와 약속을 잡기로 했다. 해수는 훈련 때문에 바쁘다며 도윤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만나자는 톡을 보냈지만 무시당할 뿐이었다. 도윤이 이유를 묻자 나는 금령이 아니야.”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도윤은 해수와 금령이 정말로 같은 인물인지 확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해룡은 자신과 같은 인물이 맞았고 제 안의 해룡은 계속해서 금령에게 사실을 전달하려 했다. 결국 도윤은 해룡의 성화에 못 이겨 국제 스포츠 대회 심사 당일, 심사가 열리는 서울 스포츠 센터에 방문했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벤치에는 해수가 앉아있었다. 도윤은 용기를 내어 해수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이 변명처럼 들릴 걸 알아.”

해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금령이 품었던 해수의 미련은 도윤의 사과를 끝으로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는 해수의 눈빛이 도윤에게는 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랑 해룡은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했어.”

도윤은 해수가 앉은 벤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해수의 눈은 고요한 바다처럼 타오르는 노을을 보고 있었다. 도윤은 그런 해수와 그 안에 살아있는 금령과 마주했다. 도윤은 입을 열었다 닫으며 금령을 상처 입히지 않을 만한 단어를 골랐다.

해룡은 금선이 금령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해룡은 자신의 존재가 금령에게 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도윤은 제 3자가 되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편이 해수에게 진실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해수는 여전히 도윤을 보지 않고 있었다.

해룡은 금령을 죽일 생각이 없었어. 금령은 용왕의 딸이었으니까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 말이 맞아. 금령은 살 수 있었어. 금령을 죽인 건 해룡의 진심이었지.”

꿈속의 금령을 떠올린 해수의 목소리가 어설프게 떨려왔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봐도 그날 해룡이 남긴 상처는 시대를 넘어 깊숙한 공간에 매여 있었다. 해수와 금령이 느꼈던 고통의 크기를 도윤과 해룡은 비로소 바로 볼 수 있었다.

진심이 아니야. 날 잊고 새로운 삶을 살길 바랐어.”

그렇게 말하는 도윤의 마음도 사무치게 저려왔다. 도윤이 돌이켜본 해룡의 생은 금령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후회투성이였다. 도윤은 전생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계속해서 해룡의 심정을 전달했다.

날 버려두고 너 혼자 행복하길 원했어. 그때 나는 멍청하고 나약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였으니까. 네게 거짓말하는 선택지조차 어리석었다는 걸 몰랐어.”

이제 도윤은 해룡과 자신을 완전히 같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끝없이 몰려오는 감정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감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네가 죽고도 널 잊지 못했어. 그 증거로…….”

금방울전?”

알고 있었구나.”

기말고사 범위였잖아.”

무표정했던 전과 다르게 해수는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도윤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울전은 자신의 후회와 사랑과 소망을 담은, 금령을 향한 고백편지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수 세기가 지나 금령과 함께 배운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시대에 여자이름인 금령을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너 때문이었구나.”

내가 죽은 후에 내용이 왜곡될 것 같아서. 일부러 네 이름을 제목으로 하라고 했어.”

?”

도윤이 잠시 뜸을 들였다. 어느새 태양도 저 너머로 넘어가다. 벤치 뒤로 긴 그림자가 그리워지고 해수의 얼굴에는 그리운 노을이 머물렀다. 언젠가 금령과 함께 걷던 노을 지는 바다가 떠올랐다. 해수가 먼 과거를 되짚어 올라가듯이 사라지는 빛무리를 응시했다. 그제야 도윤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순간들이 금령에게도 소중했음을 깨달았다.

해룡의 가장 큰 실수는 금령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온 것이었다. 금령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금령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룡은 금방울전을 지으며 자신이 가져간 금령의 이야기를 금령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의 주인공은 너고 오로지, 너만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도윤의 말에 해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억겁의 시간동안 차갑고 무거웠던 응어리가 푸르른 위로와 함께 흩어져갔다. 해수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토록 일등을 갈망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무의식적인 노력이었다. 과거에는 자신의 인생을 해룡에게 바쳤으니 이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도윤이 금령의 인생을 돌려주었었다. 이제 해수는 필사적으로 주인공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 해수는 도윤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 또한 해룡이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이야기였다. 이미 몇 번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준 해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요란한 호각소리가 울렸다.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해수는 자유롭게 팔을 휘저었다. 터치 패드를 찍은 해수는 순위를 확인하기보다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이 지나온 흔적이 물결치고 있었다.

수영이란 무엇일까? 해수는 생각했다. 수영이란 독주다. 레일은 인생이며 레일에 자리한 선수들은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들은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저마다의 멋진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영과 삶의 공통점은 많다. 누구의 도움 없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 나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출발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에 기꺼이 나를 넣어주는 사람들. 이들 덕분에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도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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