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교사가 행복한 ‘참교육’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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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교사가 행복한 ‘참교육’을 꿈꾸다
  • 이철승
  • 승인 2023.10.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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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임용, 안동대 최초로 장학사까지
포항 지진, 코로나19 등 숱한 위기도 극복해
영주여자고등학교장, 이용욱(한문·81) 동문
지난달 25일 영주여자고등학교 교장실에서 이 동문을 만나 이야기 나눴다.
지난달 25일 영주여자고등학교 교장실에서 이 동문을 만나 이야기 나눴다.

 

우리대학은 사범대학 8개 학과와 교직이수 과정을 보유한 12개 학과를 운영하며 지난 3년간 매해 80명이 넘는 중등교원 임용시험 합격자를 배출할 정도로 교사 양성과 인연이 깊다. 지금은 장학관, 장학사 등 교육전문직은 물론 교육장도 여럿 배출했을 정도로 교육계 안에서도 어느 정도 입지가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터뷰의 주인공 이용욱 동문이 17년 차 중견 교사로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교사들 사이에서도 출신 대학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이 동문은 2002년에 우리대학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학사가 됐고, 교감(2011~2013), 교장(2013~2015), 장학관(2015~2017), 중등교육과장(2017~2018), 교육장(2018~2020)을 두루 거치며 학교 안팎을 가리지 않고 학생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먼 길을 달려 교장으로 다시 학교에 돌아온 이 동문, 이미 정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은퇴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교정으로 돌아오길 선택했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서 참교육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 설명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9월 1일 영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우리 학교 교직원이 72명 정도 되는데, 이분들과 함께 학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양한 교육 활동에 참여하도록 지원해주는 게 교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학교 구성원 모두가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일, 고등학교인 만큼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애쓰고 있다.

어릴 적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고향이 안동 녹전면이다. 지금도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속하는 곳인데 옛날에는 더했다. 그런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배구부를 했다. 운동부가 으레 그렇듯 엄한 군기 속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다. 고작해야 전교생 120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가 대회만 나가면 안동서부초, 용상초처럼 천 명 가까이 되는 큰 학교를 이기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때 선생님이 참 열심히 격려하고 지도해주셨다. 녹전면에서 시내까지 버스 타고 30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인솔하고, 사정이 넉넉지 않으셨을 텐데도 간식까지 챙겨주셨다. 중학교도 자연스레 녹전면에서 다니며 잠시 배구도 계속했다. 아무래도 운동에 집중하다 보니 공부에 소홀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부모님이 ‘이젠 공부를 좀 해보는 게 어떻냐’고 하시더라. 나도 배구를 그럭저럭하긴 했지만 선수가 되겠다는 엄청난 열정이 있던 것은 아니어서 그때부터 공부로 마음을 돌렸다. 근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기만 하다가 책상에 앉아있으려니 도저히 집중을 못 했다. 아마 5분도 채 못 버틴 것 같다. 그래도 1분, 2분씩 앉아있는 시간을 늘려가다 보니까 어느 정도 공부를 따라가게 됐다. 고등학교는 경안고에 갔는데 이때는 제법 열심히 공부했다.        

한문학과를 지원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1979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 예비고사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재수를 선택했다. 안동을 떠나 대구에 살며 학원까지 다녔는데 재수 성적도 그다지 높진 않았다. 고민하던 와중에 학교 교장 선생님이던 친구 아버지가 해주신 상담이 결정적이었다. 옛날에는 국어 시간에 한문을 함께 배웠는데, 70년대에 별도 과목으로 분리됐지만 제대로 한문교육과가 만들어지거나 교직이수과정이 운영되지 않았다.

마침 1979년에 안동대에서 한문학과를 신설했고 교직이수가 가능할 테니 가서 선생님을 준비하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나는 이과 계열이었고 한문에 큰 관심도 없었는데 말씀을 듣다 보니 괜찮아 보여서 한문학과에 지원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지만, 나도 지방을 떠나 서울에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안동대가 국립대고 집에서 가까웠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서울이나 큰 도시로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대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그래서 입학 이후에도 학교에 큰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5월에 학교 체육대회가 열렸다. 주변 친구들이 내가 배구를 좀 해봤다는 걸 알고 있어서 한문학과 대표로 배구 종목에 출전했다. 오랜만에 배구를 하다 보니 당연히 재밌었고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중에는 도민체육대회 일반부 배구 선수까지 나갔다. 그때부터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학과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학교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그때 선거는 학과 대표들이 참여하는 간접선거였다. 후보가 다섯 팀이었는데 안동고 두 팀, 경안고 두 팀, 대구 출신 한 팀이었다. 그때 안동고와 경안고는 서로 우열을 다투는 라이벌 관계가 강했다. 다섯 팀 모두 양보나 사퇴 없이 끝까지 정말 치열한 선거를 펼쳤다. 돈도 꽤 많이 들었던 것 같다. 1차 선거에서는 40표를 얻어 1위였는데 과반 득표에 못 미쳐서 결선투표에 갔다. 지금 와서는 다 추억이고 그냥 하는 이야기지만 상대 후보는 어떤 물밑 작업도 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는데 나는 순수하게 가만히 결과만 기다렸다. 결국 1차 투표에서 25표를 얻었던 2위 후보가 결선에서 57표를 얻고 당선됐다. 열성적으로 도와준 친구들과 금전적으로 뒷받침해주신 부모님께 미안하고 아쉬웠다. 아마 신문에도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본지 제30호 확인 결과 이 동문의 기억대로 1차 선거에서 유권자 112명 중 무효표 1표를 제외하고 40표를 얻어 1위를 기록했지만 결선투표 결과 아쉽게 다섯 표 차로 낙선했다)

한문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선거가 끝나고 졸업반이 됐다. 다행히 입학할 때 계획대로 교직과정을 이수해서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재수에 선거까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컸기에 새벽같이 일어나며 시험을 준비했다. 그 결과 초수에 바로 합격하고 이듬해 3월에 임용됐다. 처음 학교에 발령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참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공에 대한 건 그런대로 가르쳤지만 여러모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고 더 배웠으면 좋았을 걸 생각했다. 지금이야 절대 안 될 일이지만 과거에는 체벌이 만연하지 않나. 나도 몇몇 순간들이 후회된다. 기억에 남는 제자를 꼽으라면 장학금 받아가며 힘들게 공부해서 교사가 되고, 지금은 장학사가 된 제자가 기억에 남는데, 이것도 돌이켜보면 나는 별로 잘한 게 없는데 제자들이 잘해준 것 같다.

장학사, 장학관, 경상북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교육장 등 다양한 보직을 두루 거치셨습니다. 학교에만 머무르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셨는데 어떠셨나요?

고향 친구이자 민속학을 전공한 친구가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던 시절이었다. 아마 1995년쯤이었는데 그 친구가 교육연구사, 장학사 같은 교육전문직 제도에 대해 처음 알려줬다. 그래서 교육부 교육전문직 시험을 준비했는데 나이 제한이 걸림돌이 됐다. 그때가 1996년도니까 아마 36세로 기억하는데 내 생일이 3월 2일인데 그때 뜬 공고가 하필이면 62년 3월 1일 이전 출생자까지만 응시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교육부 전문직전형에 지원하지 못했다. 그 이후 교육부가 아니라 경북으로 눈을 돌렸고 약 3년 간 전문직전형 시험 준비를 해 2002년에 경북교육청 장학사가 됐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아들과 같이 독서실을 오갈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아내가 나더러 “고등학생 때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도 갔겠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처음 장학사가 됐을 때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지역, 다른 직종도 비슷하겠지만 특정 대학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는 경우가 있다. 경북 교육계도 분위기가 그랬다. 안동대 출신으로 처음 장학사가 됐기 때문에 나를 향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자칫 ‘어디 안동대 같은데 나오니까 저렇게 실수만 한다’ 같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노력했다. 후배들에게 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장학사를 9년 6개월 하고 또 인사 담당까지 맡을 수 있던 것은 그런 나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사는 110%의 확신이 있을 때 시행해야 하는 일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 적재적소에 선생님들을 배치하고자 했다. 장학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교육부 교육공무원인사위원으로 국립대 총장 임용 절차에 관여하기도 했다.

학생 수 감소, 교권보호 등 다양한 교육 이슈들이 생각나는데요, 학교 밖에서 본 교육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또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인사 업무를 해본 만큼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 인사 업무는 곧 교원 수급 문제이고, 이는 학생 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작년 출생자 수를 보면 25만 명도 안 된다. 그동안은 학급별 인원수 감소로 대응해왔는데, 영주여고도 마찬가지지만 어느덧 학급별 인원이 20명 선까지 내려왔다. 더 이상 감축은 무리다. 그렇다면 이제는 학교 자체의 존폐를 걱정해야 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중심학교와 지원학교를 지정하는 것이다. 학교 중에서도 읍내, 시내 학교들은 인구소멸이 늦어 비교적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곳을 중심학교로 삼고 인근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모여서 수업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근 학교에서 올 학생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통학 택시도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규모가 작기에 충분히 현실성 있는 제안이다. 그리고 중심학교를 제외한 인근 학교들은 지원학교로 다양한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특성화시키면 된다. 예컨대 농업 교육을 특성화시켜서 농장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실현된다면 폐교하거나 학생들이 지나치게 규모가 작은 학급에서 교육받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단순히 일자리나 학교 존폐 문제를 떠나서 학생들이 상생과 협력을 배우지 못하고 소수집단 생활에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사회성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다.

교권보호도 중요한 문제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98년도에 근무했던 부석고와 자매결연을 한 서초고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수업하는 모습을 보니 학생은 엎드려 자고 선생님은 깨우지도 않고 있더라. 나중에 물어보니 저 학생들은 밤에 학원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오기 때문에 깨우면 오히려 자기가 방해받았다고 생각한다더라. 그때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우리 지역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똑같이 엎드려있고 교사는 함부로 깨우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교원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도 생기고 아울러 학생 의견도 존중받아야 한다. 교사와 학생의 균형이 시계추 움직이듯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선 안 된다. 개인적으로 기본법이 아닌 학교, 학생만을 위한 법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번 새로운 법만 앞세우다 보면 결국 모순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단기적인 대책에 급급해하지 말고 교육적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포항 지진, 코로나19 등 최근 몇 년 동안 교육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사건 사고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지진이라고 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사상 초유의 수능 연기 사태였는데 당시 책임자가 경북교육청 중등교육과장인 나였기에 경북을 대표해서 교육부 회의까지 다녀왔다. 원래 경상북도 수능본부가 구미인데 지진 이후로 포항으로 본부를 옮겼다. 그리고 시험 시작 전, 시험 중, 지진의 강도 등을 고려해 수많은 시나리오를 세웠다. 거의 첩보 영화 수준이었다. 시험장 반경 60km 이내에 임시 시험장 12곳을 준비하고 수험생을 이송할 버스까지 대기시켰다.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참 다행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에는 의성 교육장으로 있었는데, 그동안 교육 환경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비대면 학습이 대표적이지 않나. 덕분에 수업 기자재 같은 시설 면에서 좋아진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대면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는 동안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이건 비단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즈음 교육 현장을 두고 후배들의 걱정이 많습니다. 심지어 교사가 되기를 포기하려고 고민하는 학생들도 늘어나는데요, 선배로서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교사의 길을 포기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사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미 내가 중등교육과에 있을 때도 신임 교사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사표를 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학생과 관련된 문제, 특히나 학부모님과 소통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고 들었다. 참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후배들이 극복하고 멋진 교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른 일이 아닌 오직 교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보람이 분명히 있다.

‘참교육’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 법으로 명시할 수 없는 진짜 올바른 교육, 진정으로 학생을 아끼는 교육 말이다. 그동안 교육계도 많이 바뀌고 많은 문제를 개선했지만 교육의 본질적인 면에서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나는 교육의 본질이 학생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발현시키고 그 역량을 잘 키워나가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나는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지만 우리 후배들은 부디 교사로서 그 역할을 잘 해내길 바란다. 꼭 교사가 아니더라도 여기에 공감하며 상생하고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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