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시대는 누구의 시대입니까
상태바
지방시대는 누구의 시대입니까
  • 이지윤
  • 승인 2023.09.04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랏님’ 시혜가 된 문화도시사업
문화를 돈으로 평가하는 세상

법정문화도시 지정을 준비하던 도시가 큰 충격에 빠졌다. 제5차 문화도시 지정을 추진 중이던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지난달 14일 안동시를 비롯한 예비문화도시 16곳을 긴급소집했다. 내용은 예산과 일정 등의 이유로 제5차 문화도시 지정평가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심사자료 제출을 고작 보름 남긴 상황에서 예비문화도시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미 연초에 확정된 사업계획이었고 올해 총력을 다해, 길게는 3년 이상 준비한 사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문체부는 대체사업으로 ‘대한민국 문화도시’를 내세웠다. 그러나 당장 11월이 심사지만 명확한 기준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사업개요만 보더라도 기존 법정문화도시와 성격이 매우 달라 단기간에 준비하기 어렵다. 심지어 서울시 자치구는 규정상 신청 자체가 불가능해 일말의 선정 가능성도 잃었다. 안동시는 대한민국 문화도시에 다시 도전한다는 입장이지만 기존 예비문화도시의 성과가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안동시는 지난해 제4차 문화도시 지정의 문턱에서 특별한 결격사유 없이 석연찮은 이유로 탈락했기에 아쉬움이 더 크다.

‘문화’도시사업 아닌 문화도시‘사업’

대한민국 문화도시는 지역별 특색있는 문화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지역의 문화창조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문체부 장관이 지정하는 도시로 2024년부터 2027년까지 약 100억 원의 국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겉보기엔 기존 법정문화도시사업과 목적도 같고 예산도 동일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안동시를 포함한 16개 예비문화도시는 현재 지자체 지원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며 올해 5차 문화도시에 선정될 경우 곧바로 국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이번 대한민국 문화도시로 선정되더라도 내년 한 해는 국비 없이 전액 지자체 예산으로만 운영하도록 지침이 내려졌다.        

애초에 대한민국 문화도시로 가기 위한 길이 첩첩산중이다. 오는 11월 14일이 신청 마감일임에도 현재 대략적인 가이드라인 몇 장에 의지해 사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이드라인을 보더라도 확 바뀐 기조에 기존 예비문화도시 입장에서는 숨이 턱턱 막힌다. 핵심단어들만 봐도 경제효과, 기업협력, 규제혁신, 민·관협력 투자,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효과에만 집중된 사업이다. 법정문화도시가 추구하던 시민주도, 공동체, 다양성 같은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게 문체부 사업인지 기재부의 기업 지원 사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여기까지만 봐도 현 정부의 자유경쟁과 시장경제 기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게다가 지난 6월 대한민국 문화도시 공모계획을 발표할 때도 ‘권역별로 고르게 분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전했다. 정녕 지역균형발전을 고려하는 정책인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기업, 경제발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안동시가 얼마나 승산이 있을까.

문화를 돈으로 보는 이 사업으로 원래 경제력과 인프라가 갖춰진 도시들만 승승장구할 전망이다. 안동시를 비롯해 맨땅에서 시민의 힘만으로 문화도시 사업에 뛰어든 도시들의 전망은 암울하다. ‘지방시대’라지만 결국 잘되는 지방은 따로 있는 무늬만 지방시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새가 되어 날아간 시민의 꿈

기존 법정문화도시는 시민 거버넌스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문화도시에서는 ‘시민주체’에 대한 내용을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 시민은 오로지 이 기업, 저 기업, 지자체와 협업하며 숟가락만 얹으면 되나 보다. 시민은 실질적 ‘발전’성과를 도출해야 하는 지자체와 연계하는 대상일 뿐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사업이다. 애초에 투자유치, 일자리 창출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오로지 기업과 지자체가 하는 일에 껴서 즐기라는 뜻으로 들린다. 다른 예비문화도시와 마찬가지로 안동시 또한 ‘시민공회 모디’를 중심으로 자체적인 프로그램과 행사를 진행해왔다.

나 또한 오랜 시간 문화도시안동을 통해 시민의 힘, 시민이 만들어낸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시민문화기획자 양성 교육 이수 후 실제로 서경지 마을에 투입돼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바 있다. 마을 주민들과 작은 골목길에 주민 주도 축제를 개최해 지역 예술인과 주민 간 진정한 화합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문화도시안동의 대표공간이라 불릴만한 성좌아트홀도 지난 3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위기다. 한센인 시설의 버려진 교회 건물은 문화도시안동을 만나 아트홀로 새 생명을 얻고 한센인과 지역민 사이의 오랜 고통과 편견의 벽을 깼다. 그런데 만약 대한민국 문화도시의 잣대로 이곳을 본다면 새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못하고 하루에 많아야 몇십 명이 찾는 경제성 떨어지는 공간일 뿐이다. 칙칙한 골목길을 주민의 웃음소리로 채우고, 70년의 오해를 풀고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일을 정녕 정량적인 수치로, 성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나는 안동 ‘시민’이고 싶었습니다

대학 입학을 위해 의지할 곳, 즐길 곳 하나 없는 낯선 곳에 혈혈단신으로 와 안동시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문화도시안동’ 덕분이다. 내가 주체가 돼 행사를 진행해볼 수 있고 상상으로만 했던 청년 행사, 마을 행사를 실현해가면서 시민들의 행복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어쩌면 안동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하찮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겐 스스로 시민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고 지역에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계기였다. 그러나 그런 소중한 사업이 공중분해 되는 지금, 3년에 걸친 시민의 노력이 정부 한마디에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지금, 나는 자랑스러운 시민이 아닌 그저 외지에서 온 한 마리의 철새일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