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대를 살고 싶지 않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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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대를 살고 싶지 않게 하는지
  • 이지윤
  • 승인 2023.06.0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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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 올 수 있었나요?
자살은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다

스쳐 지나간 여러 잔상이 떠올랐다가 이내 물속으로 가라앉듯 사라진다. 가십으로 떠들어대는 연예인의 죽음, 빈 교실에서 손목과 허벅지를 북북 그어대던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친구,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OECD 국가 중 자살 1위 ‘대한민국’ 같은 이야기들. 자살 1위네 뭐네 하던 소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떠들었지만 바뀐 건 하나도 없는 듯하다.

또다시 어떤 연예인의 죽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무슨’ 이유로라는 연관검색어가 줄줄이 달릴 테다. ‘자해 그런 거 죽을 용기도 없는 애들이 하는거다’고 말할 테다. ‘요새 애들은 픽하면 죽는다’라고 남겨진 이들에게 칼을 꽂을 테다. 우리는 줄곧 그래왔다.

버티던가 죽던가, 선택하게 만드는 사회

군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해 자살한 청년,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청소년, 직장 괴롭힘으로 자살한 청년 이 모든 사건이 특이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담긴 뉴스 기사에는 ‘요새 것들은 군기가 빠져서 그렇다’, ‘괴롭힘당할만했으니 그런거다’, ‘직장 상사한테 혼도 나고 그래야지’같은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모두 그들의 죽음을 마치 개인의 탓인 양 취급한다. 어쩌면 자살은 타살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죽지말고 싸우자. 그대의 불행은 그대의 탓이 아니다. 책임의 주체를 묻고 정정당당하게 그를 탓하자. 그들이 사과하게 만들자.

우리를 슬프게 하는 당연과 성공

과도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당연하게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 취업을 하는게 정답인 듯 살아간다. 정답이 있는 삶을 강요당하며 조금이라도 다른 수순을 밟게 될 때 상대적 박탈감과 성공에 대한 압박으로 청년은 더 우울해지고 고립된다.

경상북도정신건강복지센터에 따르면 안동시 자살사망자는 ▲2021년 42명(26.7%) ▲2020년 40명(25,2%) ▲2019년 39명(24,3%) ▲2018년 48명(29.4%)이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1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10대~30대의 사망원인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숨이 막힐 듯한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끝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쉬운 선택지가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다

한국기자협회가 마련한 ‘자살보도 윤리강령’에는 기사 제목에 ‘자살’을 언급하지 말라는 권고가 담겨 있다. 이에 따라 대다수 언론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 단어가 자살과 같이 취급되고 있는 데다가 최근에는 자살예방을 위한 아무런 근거도 효과도 없다는 학계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자살을 두고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지 말자. 자살을 피하기 위한 그 단어는 마치 본인이 적극적인 의지로 자살을 ‘선택’한 것처럼 꾸민다. 선택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왜 그런 선택을 했나요’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죽음과 달리 자살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기보다 죽음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불편해하지 말고 마주 보자

어쩌면 자살이라는 문제는 남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말조차도 어찌보면 자살을 외면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자살하면 안 돼’라는 교육을 줄곧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을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낼 수 있을까. 본인이 이야기하기를 어려워한다면 먼저 ‘자살’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언제든지 손을 내밀테니, 넘어져도 좋으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한다.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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