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마을문지방을 지키는 도예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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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마을문지방을 지키는 도예가가 있다
  • 이철승
  • 승인 2023.06.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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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솔뫼인을 찾아 (77), 현도예 도자기 작가, 김강현 (미술·86) 동문
패기 하나로 독학 시작한 도자기
지금은 명인 꿈꾸는 어엿한 도예가
안동에서 마을공동체 꿈 실현 중
지난 1일 태화동 서경지 마을에 위치한 현도예에서 김 동문을 만났다.
지난 1일 태화동 서경지 마을에 위치한 현도예에서 김 동문을 만났다.

 

안동시 태화동에 위치한 서경지 마을. 최근 골목길의 예쁜 풍경과 주민들이 주도하는 문화행사가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모범적인 마을공동체로 꼽히는 곳이다. 벽화가 칠해진 예쁜 골목길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면 서경지 마을의 문지방 ‘현도예’가 보인다. 이곳의 주인 김강현 도예가는 우리대학 미술학과와 교육대학원을 나와 23년째 안동에서 도자기 공방을 운영 중이다. 23년 전,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김 동문. 시골 공방에서 독학으로 도자기를 공부하던 그가 이제는 어엿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지역의 대표 예술가로 손꼽히고 있다. 작가로서 190여 회의 전시와 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양화 전공이라는 특이한 이력은 오히려 보통 도자기 사이에서 그의 작품에 개성을 더해준다.

또한 서경지 마을에 본격적인 마을공동체가 형성된 것도 지난 2020년에 그가 서경지 마을로 이사 온 이후부터다. 지난달 현도예 공방을 찾아 도예가이자 마을공동체의 리더격을 맞고 있는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나요?

미술학과에는 예체능 특유의 끈끈한 문화가 있다. 지금까지도 가깝게 연락하며 지낼 정도다. 매년 체육대회를 하면 운동으로는 큰 성과를 못 냈어도 응원상은 놓쳐본 적이 없다. 이기든 지든 땡볕 아래에서도 빠짐없이 응원전에 참여했고 상금으로 진하게 먹고 마신 추억이 있다.   전역 후 복학했을 때는 이전과 분위기가 좀 달랐다.

나도 그랬지만 보통 조용히 자기 그림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미술학과에서도 적극적으로 데모에 나설 정도였으니 당시 정치가 참 엉망이었던 것 같다. 시내와 목성동 일대에서 행진도 했고 김영균 열사 분신 이후에는 직접 걸개그림도 그렸다. 커다란 천에 흑백으로 영정을 그린 기억이 난다.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요?

졸업과 동시에 미술학원을 개업했다. 일과 작품활동을 병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경제활동 없이 완전히 전업 예술가의 길을 걷는 작가는 거의 없다고 본다. 주변에 같은 선택을 한 선배들도 많았다. 처음 2년 정도 입시 미술을 했고 나중에는 아동 미술도 가르쳤다. 그렇게 한 4년을 운영하다가 미술학원을 접었다. 그 이유는 시대가 변하면서 학원도 변하고, 뭔가 변화와 발전이 필요한 것 같은데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곧바로 다른 일을 구하진 않고 방황의 시간을 좀 보낸 뒤에 서울에 직장을 잡았다. 요즘은 없지만 그땐 사진관에 배경그림이란게 있었다. 옛날 영화관 간판을 직접 그렸듯이 사진관에서 촬영할 때 뒤에 세워둘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요즘에는 전부 CG로 하겠지만 간혹 가족사진용 커다란 배경 같은 경우는 직접 그린 그림도 남아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을 3년 정도 잘 하던 차에 IMF가 터져버렸다. 회사가 굉장히 힘들었고 1년 정도를 무급으로 일했다. 그러다보니 빚도 생기고 형편이 좋지 못했다. 당시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쌀이 떨어져서 얻으러 다닐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고 고향에 내려갈 면목이 없었다.

새롭게 찾은 일은 뭐였나요?

여주에서 도자기 하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연락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마침 사람 구하는 곳이 있다고 소개해줬다. 거기서 도자기를 바로 배운 것은 아니고 인형(토우) 작업과 석고에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도자기에 큰 뜻이 있던 것은 아니고 당장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1년을 쭉 이 일만 하다가 친구를 따라서 큰 공장에 구경갔다. 거기서 투각 전문가였던 선생님 한분이 내게 “6개월 정도 배웠으면 너도 도자기 시작해봐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던가, 내가 하던 작업 외에 아는 게 없어서 그냥 흘려듣다시피 했다.

다시 안동에 내려오신 계기가 있나요?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가던 시점인데,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혼자 남아계셨다. 아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가 보면 집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계속 마음이 쓰여서 아내에게 안동에 내려가자고 했더니 ‘뭐 하고 살거냐’ 묻더라. 문득 도자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안동에 도자기 하는 분이 많이 안계셨다. 그렇게 시골에 작업실을 하나 얻은 후 여주에서 배워온 토우만 계속 만들었다. 지금처럼 접시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가 드라마 ‘태조 왕건’이 유행하던 시점에 첫 제작 주문이 들어왔다. 왕건, 궁예, 견훤을 토우로 만들었고 첫 납품에 성공했다. 공방이 자리 잡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1년을 그렇게 보내고 공방도 풍산에 있는 폐교인 풍동초로 옮겼다. 본격적으로 해보니까 혼자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아내를 설득해서 같이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손재주가 굉장히 좋더라. 지금 공방에 있는 아기자기한 작품들도 전부 아내가 만든 것이다. 그 무렵 학교나 학원의 체험학습이 유행이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려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전단지를 뽑아서 안동 시내 아파트에 뿌리고 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도자기 체험학습을 시작하면서 생활이 좀 나아진 것 같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토우 외에 컵과 그릇, 그 밖에 장식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3년 차까지도 상당히 힘들었다. 아내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칼라믹스를 배우기도 했고 이때부터 직원을 채용해서 제품을 만들고 팔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내가 만든 도자기를 들고 여주, 이천, 대구, 전국 각지에 직접 찾아가서 물건을 보여주며 발품을 팔았다. 5년 차 정도 됐을 때는 주변 도예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제품을 본격적으로 도매상에 팔기 시작했다.            

도자기 비전공자로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도자기를 거의 독학으로 배웠다. 토우만 만들다가 생활자기를 만들기 시작할 때도 장식품을 만들 때도 그랬다. 근데 다른 부분은 몰라도 물레를 차려면 선생님에게 1년은 배워야 한다. 미술학원 제자 중 한 명이 도예과를 나왔다. 마침 안동에 있었는데 딱 3일 가르쳐주고 그 친구가 타지로 가버렸다. 매일 30분씩 꼬막을 밀고 물레를 찼다. 일주일 지나니까 안 아픈 데가 없더라. 그래도 조금 감이 오더라. 계속하고 또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모양을 찰 수 있게 됐다. 그다음 고비가 굽을 깎는 것이었다. 물레를 차고 나서 주변에 붙은 흙덩어리를 칼로 깎는 작업인데 내가 찾은 방법은 막걸리였다. 그걸 들고 무작정 다른 공방에 찾아가서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굽 깎는 것 한 번만 보여주세요’ 요청드렸다. 사실은 굉장히 실례가 될 수도 있는 행동이다. 이렇게 어깨너머로 본 방법을 혼자 계속 연습했다. 요즘에야 유튜브가 있지만 예전에는 교육용 영상물이 조금 있어서 참고할 수 있었고 축제장에 가면 물레 체험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러면 거기 계속 서서 봤다. 결론적으로 깨달은 점은 물레 차는 법은 기본만 정해져 있고 각자 개성이더라. 아무튼 나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지금도 물레를 잘 차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혼자 연습하고 있다.

교육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비전공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학부 시절에 교원 자격을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걸 따면 작가로서 마음가짐이 해이해질 것 같았다. 작가라면 작품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공방을 차린 이후에 강의를 나가려니까 관련 자격증도 없고, 비전공자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2010년에 교육대학원에 들어갔고 자격을 갖추고 나니 확실히 폭이 넓어졌다. 자격증이라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꼭 필요하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계속 공부하면서 얼마 전에는 미술 심리치료 자격증까지 땄다.

서경지마을과 인연 시작은?

풍동초에서 10년을 보내고 문천초로 공방을 옮겼다. 이후 수강생들이 찾아오기 힘들다 보니 용상동(마뜰)에 분점을 두고 2, 3년 정도 두 곳을 왔다 갔다 했다. 금전적으로도 부담이 됐고, 2019년에 마뜰이 도시재생사업 대상지가 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많았다. 그래서 새로운 곳을 물색하다가 후배의 추천으로 서경지 마을의 빈집을 알게 됐다. 근데 집주인이 누군지도 알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주인과 연락이 닿았고 한 달 만에 그 집을 살 수 있었다. 평범한 시골집을 공방으로 고치는 과정이다 보니 공사가 많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컵과 계란 두 줄을 준비해서 동네에 싹 돌렸다. 미협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천연염색가 신계남 선생님, 서예가 임동구 선생님과도 이웃이 됐다. 두 분도 내가 이사 오는 것을 알고 잘됐다며 축하해 주셨다. 깜짝 놀랐던 것은 옆집 미용실 때문이었다. 처음 집주인을 수소문하던 시절부터 반응이 영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미용실에서 개업 축하 봉투를 건넸다. 이때 한 방 맞은 듯했다. 옛날처럼 마을 대소사를 서로 챙겨주는 동네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 꿈이 작가들이 모여 살면서 이웃들과 끼리끼리 어울려 노는 것이었는데 그 꿈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문화도시사업과 함께 마을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문화도시팀 임정혁 팀장과 예전부터 학과 선후배 사이기도 했고, 마뜰에 있을 때나 문화도시사업을 처음 추진할 때도 몇 번 회의에 참여했다. 워낙 바쁘다 보니 문화도시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진 못했는데 서경지 마을에 자리를 잡고부터 좀 숨통이 트였다. 2022년 1월에 예술분과장을 맡으면서 문화도시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그 결론이 문화도시는 ‘관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는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예술가들과 만나서 시너지를 내기 정말 좋은 사업 같았다. 그때부터 주변 예술가들을 만나면 문화도시에 대해 소개했다.

마을 사업은 내가 2021년부터 ‘마을 문지방’ 역할을 맡으면서 현도예에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첫 모임에 열세 명이 모였는데 서로 잘 몰랐다.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끼리 교류가 적어졌다고 하는데 골목길이라고 별반 다르진 않았다. 내가 이사 올 때부터 이웃들과 인사하며 안면을 튼 덕분에 나를 매개로 소통의 시간을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회의를 거듭하다 보니 다들 골목길에서 마주치면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뻤다.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니 처음에 관심 없던 주민들도 ‘내가 뭐 도와줄 것 없나?’ 하면서 찾아오셨다. 어떤 분은 떡값으로 50만 원을 쾌척하기도 하셨고, 대목장 한 분은 한옥 대들보를 활용해 마을 벤치를 만들어 기증하기도 했다.        

마을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부담스럽다거나 크게 걸리는 점은 없었다. 더러는 내가 사람들 모아서 개인 도자기 공방 잘되게 하려고 여기 집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 소득은 거의 다 외부 주문 제작에서 온다. 그런 생각은 착오일 뿐이다. 다만 내가 마을공동체에 대해서 따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니까 나 혼자 생각한 대로만 진행해 온 것 같아 아쉽다. 어떤 게 진정 마을을 위한 길인지 스스로 많이 고민했다. 마을 차원에서 수익을 내거나 자비를 내서라도 선진지 견학을 가서 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서경지 마을의 목표는 뭔가요?

구경하는 맛이 있는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주민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요즘 유행한 불멍, 물멍처럼 ‘사람멍’이 참 재밌다. 사람들이 붐비는 골목이 되면 어르신들도 정자에 앉아서 구경하는 맛이 있다. 가끔 산책하는 사람들이 ‘어? 여기 이런 게 생겼네?’ 하면서 소소한 변화를 느낄 때가 있다. 크게 뭘 바꾸는 게 아니라 조금씩 주위를 꾸며가며 바뀌는 골목길이 됐으면 좋겠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낸다면 마을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골목을 꾸미고 싶다. 남이섬에 가면 눈사람 기념품을 사 오듯이 서경지도 특색있는 캐릭터를 만들면 홍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도예가로서, 작가 개인으로서 향후 계획은 뭔가요?  

명인에 도전해 보고 싶다. 원래 같았으면 겸손하게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하냐고 생각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요즘에는 다들 젊어서부터 자기 프로필을 홍보하는 데 적극적이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남이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에 소극적으로 굴면 아무도 몰라준다. 내가 이 정도 할 수 있다는 걸 내세울 필요가 있다. 내 좌우명 두 가지가 ‘웃으며 살자’, ‘즐겁게 살자’다. 도자기를 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봉사가 주는 쾌감이 있다. 사실 도자기 가격에 훨씬 못 미치는 돈을 받을 때도 많다. 그렇지만 어려운 이웃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진행한다.  봉사는 내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이다.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나는 도자기를 잡기 전까지 직업이 10개 정도 됐다. 직접 경험해보고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았다. 잘 안 풀린다고 위축되지 말고 도전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젊어서 그랬던 것처럼 남들의 인정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줘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격증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여도 나중에 내 능력을 증명하려면 꼭 필요한 순간이 온다. 누구나 완벽하게 계획한 틀 안에서 살 수는 없다. 부딪쳐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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