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인문학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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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인문학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 안동대학교 신문사
  • 승인 2023.05.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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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이 국내에서 누적 관객 500만명 이상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2011년 3월, 2만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낳은 동일본대지진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의 참사에서 가족을 잃은 주인공을 통해 희생자를 위로할 뿐 아니라, 재난과 고통 그리고 치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지구적 재난이 가져온 일상의 단절과 파괴가 오버랩되면서 영화의 주제는 일본을 초월한 시대적 보편성을 얻는다.

우리 시대 인문학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스즈메의 문단속’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난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고 있는 한 편의 ‘인문학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인문학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단순히 ‘인문학의 필요성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인간의 본성과 가치 및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과 성찰을 통해 삶에서의 교훈을 얻고, 사회와 공동체의 여러 문제에 대한 윤리적이고 비판적인 이해와 접근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비록 진부하고 일반적인 대답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묻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시대 인문학의 필요성’이며, 따라서 ‘우리 시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먼저 대두된다. 우리 시대는 과연 어떠한 시대인가? 당장 떠오르는 대답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재난의 시대’, ‘인공지능(AI)의 시대’, ‘혐오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먼저, 기후 위기에 따른 자연재해의 증대와 코로나 팬데믹의 도래는 우리 시대가 ‘재난의 시대’라는 점을 입증한다.

또한, 알파고와 챗GPT의 출현은 제4차산업혁명의 스포트라이트가 응당 인공지능의 몫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끝으로, 미디어와 온라인에서 난무하는 계급, 성별, 인종, 이념 갈등과 분노의 언어는 우리 시대가 ‘혐오의 시대’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재난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 혐오의 시대에 인문학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이다. 재난, 인공지능, 혐오 세 가지 개념은 표면적으로 보면 결을 달리하는 이질적 조합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감각’이다.

예컨대 오늘날 뉴스를 장식하는 기후 위기, 생태 위기, 자연재해, 전쟁 등은 으레 수량으로 표시된 비극 또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고통에 머무르기 때문에 늘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올해 최대의 화두 가운데 하나인 챗GPT의 출현은 누군가의 말처럼 가히 짜깁기와 표절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 거기에는 지식을 통한 자기 계몽에 수반되는 의심, 호기심, 희열,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끝으로,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상생과 공존의 가치가 무색하게 날로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재난의 극복, 인간적 소통에 기여하는 지식의 확장, 혐오에서 공감으로의 전환은 타인의 고통과 처지에 대한 감수성에서 출발한다. 특히 당면한 인류의 과제인 생태 및 기후 위기는 우리의 감수성을 인간을 넘어서 동물과 자연으로까지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한편, 인공지능의 인간화는 자칫하면 정서적 교감의 확대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개인의 취향과 개별성에 과도하게 호응함으로써 정서적 편향을 조장할 수 있다. 주관의 과잉과 감성에의 몰입은 거꾸로 보면 타자에 반응하는 감성의 퇴화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에 따른 자아의 고립을 막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존주의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인간은 피아노 건반이 아니다”라고 일갈하였다. 그는 19세기를 풍미하던 이성주의와 과학주의의 과잉에 시비를 걸면서, 분노하고 고통을 선택하며 변덕스러울 수 있는 인간, 다시 말해 감각의 다양성을 통해 자유를 분출하는 인간성을 옹호했다.

톨스토이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는 죽는다’와 같은 참인 명제 속의 죽음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실제로 겪는 고통과 죽음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통해 삶의 가치와 인간의 본질에 다가섰다. 이러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개인의 실존적 감각 및 타자의 고통에 열려 있는 자아를 일깨우며, 인간과 공동체, 자연으로부터의 단절 및 ‘무감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준다.

외국어 논문 한 편을 10초면 그럴듯하게 번역해 주는 인터넷의 기능 앞에서 인문학의 핵심인 외국어 습득이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고민하던 요즈음, ‘상상의 공동체’의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다음과 같은 통찰은 무감각으로부터의 탈피와 그에 따른 공감이 인문학의 사명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버마어를 배우고, 타이 학생들이 베트남어를 배우며, 필리핀 청년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좋은 징조다. 이들은 우물을 빠져나와 저 거대한 하늘을 보게 된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중심주의나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소통의 도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배우는 것이고, 그 사고와 감정 뒤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그들과 공감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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