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꽃피우는 문화도시 안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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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꽃피우는 문화도시 안동으로
  • 이철승
  • 승인 2023.04.04 0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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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 주름잡던 생기발랄 미대생
실력파 작가에서 도시를 색칠하는 기획자로
문화가 있는 안동, 행복한 안동을 위해
자랑스러운 솔뫼인을 찾아 (76) 안동문화도시팀장, 임정혁 (미술·90) 동문

 

지난 2021년 12월 16일 안동역에서 마지막 기차가 떠나며 지난 90년의 역사가 멈춰섰다. 그리고 이듬해, 이곳에 문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폐허가 될 뻔한 구 안동역에 새 숨결을 불어 넣은 이들은 바로 ‘시민’이었다. 시민공회(모디)를 통해 많은 토론과 설문을 통해 공사 계획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이 공간을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 ‘모디 684’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공간은 지금까지 문화도시 안동을 위한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난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예비문화도시 자격을 얻었고, 5년간 최대 200억 원을 지원받는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기 위해 지난해부터 지역문화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 커다란 열정과 책임감을 끌어안고 누구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가 바로 임정혁 문화도시팀장이다. 그는 우리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화가로서 재능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기획자로서도 남다른 감각을 보여왔다. 지난달 모디684에서 임 동문을 만나 나눈 이야기에서 문화도시를 향한 그의 꿈과 추진력, 그리고 문화기획자의 모습에 가려졌던 ‘작가 임정혁’의 세련된 면모 또한 엿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정신문화재단 문화도시 팀장 임정혁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사업 중 하나인 문화도시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예비문화도시인 안동시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법정문화도시가 되기 위해 팀원들, 시민 여러분, 전문가, 시청 등 민관 거버넌스가 합심하고 있다.    

문화도시 사업과 모디684의 전반적인 소개 한마디로 말하자면 ‘문화로 행복한 삶’을 위한 사업이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사업으로, 어떻게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문화도시 사업을 도시재생사업과 헷갈리시기도 하는데 ‘주민 삶의 질 개선’이라는 목표는 같지만 성격이 다른 사업이다. 도시재생사업이 하드웨어적으로 도시 환경을 개선한다면 문화도시 사업은 시민이 소프트웨어가 되는 일종의 휴먼웨어 사업이다. 기존 정책과 다르게 시민이 스스로 삶을 바꾸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문화도시사업의 거점 공간이 바로 모디684다. 알다시피 안동역이 이전한 후 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지만 안동역에 쌓인 수많은 만남과 이별, 그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시민들이 직접 나서 조성한 공간이다. 그동안 안동에는 시민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주도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많은 시민이 모디684를 통해 회의, 공연, 교육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작년 한 해만 대관이 1,370건 정도 이뤄졌고 시설을 이용하거나 관련 행사에 참여한 인원은 2만 5천 명이 넘었다.

미술학과에 진학한 이유

1989년에 재수를 하며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탓에 입시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 수채화를 제대로 배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소묘 시험만 치는 미대를 찾아봤는데 마침 안동대가 눈에 들어왔다. 안동에 연고는 없었지만 고향인 강원도 동해시가 경상도와 교류가 잦은 지역이라 막연하게 좋은 느낌이 있었다. 입시 결과 안동대에 실기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이게 내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더러는 그냥 지방대라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나는 커리어에 항상 안동대를 언급할 정도로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90학번으로 입학해 굉장히 청춘다운, 생기발랄한 대학생활을 했다. 모였다 하면 난리가 났던 우리 동기 4인방은 ‘전설의 90’학번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공부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 축제에 빠짐없이 참여한 괴짜였다. 체육대회 응원상을 휩쓸고 다녔다. 전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짓궂은 장난, 사고도 많이 쳤다. ‘바바리’라는 별명에 얽힌 일화도 있다. 미대생이다 보니 늘 물감으로 떡칠된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녔다. 코트가 아니라 거지 옷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는데 거기에 컨닝페이퍼를 써놓았다. 그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워낙 지저분해서 나도 못 알아보고 ‘어디 있지…. 어디 써놨지….’ 두리번거리니까 교수님이 와서 ‘아직도 못 찾았나?’하고 한심하게 보고 가신 기억이 난다. 1990년도는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투쟁 등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친구이자 후배였던 영균이(민속·90 김영균 열사)도 기억이 난다. 데모도 참 많이 했는데 그때 미술학과는 무조건 전투조로 나서곤 했다.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선택했는데 이때 경험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긴 어렵지만 생명과 삶의 무게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시간이었다. 복학 후에는 괴짜가 아니라 학생 본연의 모습에 충실했다. 작업에 집중하고, 공모전에서 상도 많이 받고, 참 열심히 살았다.

교토시립예술대 대학원 진학, 일본에서의 경험

사실 제일 싫어하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리만큼 매우 나쁜 이미지만 가득했다. 그런데 마침 누나가 결혼 후에 일본에 살고 있었다. 졸업 후에 누나를 보러 일본에 갈 때만 해도 불만이 가득했는데 간사이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알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너무 깨끗함, 친절함, 어떤 새로운 느낌이었다. 출국할 때만 해도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편견을 벗고 직접 본 일본은 정말 ‘공부할 만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고 오히려 일본에 살던 누나는 1997년 IMF가 발생한 이후 먼저 귀국했다. 이후 일본 미대 진학을 결심했고 다행히 교토시립예술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유학 생활이 5년가량 이어졌다. 교토예술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 홍익대 이상의 명성을 갖는 역사 깊은 곳으로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에선 배울 수 없던 프레스코화를 전공했다. 프레스코화는 일종의 벽화기법으로 회반죽을 벽에 칠한 뒤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유학기간 동안 정말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서 인생에 큰 영향을 받았고 특히 신지 선생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날 정도다. 유학생이 다들 그렇듯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집에서 용돈도 받지 않고, 아르바이트도 거의 하지 않고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녔다. 거의 올 A+를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공부 외에 작품 활동도 정말 많이 했다. 개인전을 네 번 열었고 세계 최초로 프레스코 공개벽화를 그려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활동 과정에서 다양한 예술가, 단체와도 인연을 맺었다. 중국 예술문화특구 798(따산즈)의 촌장으로 있던 황루이 등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그때 만난 분들이 지금은 세계로 퍼져 현대미술의 주역을 맡고 있기도 하다.

교토예술대 안, 특별한 기억

학교 안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시 학교 도서관에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등 세계의 미술 잡지가 비치돼 있었다. 그런데 한국 잡지가 없더라. 도서관에 어떻게 바로 옆 나라 잡지 한 권이 없냐고 항의했지만 여러 이유로 결국 변화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월간미술’에 직접 연락해 잡지를 받으려 했지만 사정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유학생들이 학교 축제 때 3일 동안 김치, 라면, 떡볶이를 팔아서 얻은 수익을 월간미술에 보냈다. 월간미술이 그 돈으로 도서관과 계약을 맺은 이후부터 교토예술대에서도 우리나라 잡지를 볼 수 있게 됐다.            

일본 유학 후 계획

일본에 와보니 한국이 보였다. 오히려 외국에서 바라보니 비로소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게 됐다. 그래서 이번엔 유럽으로 가면 아시아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독일로 여행을 떠났다. 독일 유학도 고민해봤는데 언어가 문제였다. 사실 일본어는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아리가또’ 한 마디부터 배우기 시작해 금방 익혔는데, 독일어는 배우는 속도가 훨씬 느렸다. 그래서 유럽보다는 다시 한국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유학이 5년 정도 이어졌으니 어느덧 나이가 30대였다. 아무래도 요즘과 다르게 서둘러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였다. 귀국 후에는 안동에 자리 잡을 생각이었다. 나는 워낙에 여기가 좋다. 안동 근처에서 작업공간을 알아보다 예천 천호예술원에 인연이 닿아 거기서 작업을 시작했다. 한 10년 작업에 열중하며 국내외 전시 준비도 많이 하고 안동대와 경북도립대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2010년부터 작가가 아닌 큐레이터, 기획자로 근무하게 된 계기

2010년 안동문화예술의전당이 개관하면서 기획자를 모집했다. ‘꼭 맡아달라’는 아는 후배의 부탁이 있었지만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후배가 원래 우리 부부와 친분이 있었던지라 아내에게도 연락했더라. 지원 마감 전날 밤이었다. 아내가 촉촉한 눈빛으로 ‘여보, 한번 지원해보지 않을래?’ 묻더라. 사실 프리랜서 작가였기에 늘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그 눈빛을 모른 체할 수 없어 밤새 자기소개서를 써서 제출했다. 계획에 없던 지원이었지만 덜컥 합격해버렸다. 그때부터 5년간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미술관 전시기획뿐만 아니라 공연장 관리, 교육, 홍보 업무까지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아무래도 작품활동은 어려워졌다. 작가의 삶에서 기획자의 삶으로 넘어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이자 정체성을 다시 고민해보는 시기를 맞았다.

작가 시절과는 다른 기획자로서의 삶

막상 기획자로서 뿌듯한 순간이 많았다. 예술의 불모지 같던 땅에서 지역의 문화적 수준이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문화적으로 기여하고 어떤 가치를 확산시킨다는 점이 좋았다.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했을 무렵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며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가난 속에서도 저를 열심히 키워주신 존경스러운 분인데, 그날 ‘돈도 안 되는 환쟁이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말씀하시더라. 나름 유학까지 다녀온 상황에서 참 답답하고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열심히 살아주신 덕분에 저희가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는 다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문화가 있는 삶을 살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할 줄 아는 미술로 잘 사는 나라, 더 멋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스스로도 이 말에 크게 자극받고 지금까지 문화기획자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문화도시팀장으로 부임하면서 오랜만에 안동에 돌아온 감회

더 많이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 잠시 안동을 떠났다. 오산에서 미술관 전시팀장으로 근무하며 미술관 경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전시를 기획하려고 노력했다. 혜민 스님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그려진 삽화의 가치를 재조명한 전시가 기억 남는다. 2년 정도 근무한 뒤 안동에 내려오려고 마음먹고 보니 막상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었는데 마침 청송문화재단에 자리가 났다. 내가 시험 운이 좋은지 이번에도 바로 합격해버렸다. 청송은 백자를 중심으로 매력적인 전통문화 자원이 있어 도시를 브랜딩하는 재미가 있었다. 청송에서 일을 그만둔 후 휴식기를 가지려던 차에 안동에서 전화가 왔다. 그때 처음 문화도시 사업 이야기를 들었는데 뭔가 특이하고 이제야 우리나라도 제대로 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지원에 성공해서 문화도시팀장을 맡게됐다.

문화도시 안동의 미래, 어떻게 바라보나?            

문화도시 사업은 문화, 예술 등 지역의 모든 자원이 연계돼 쉽지 않은 사업이다. 대규모 축제를 열거나 큰 이슈를 만드는 사업과는 다르다. 차근차근 시민사회 의식을 바꿔나가면서 결국 그들의 의식이 모여 도시 문화를 발전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이것이 도시 브랜드로 이어진다. 안동에는 정말 좋은 DNA가 있다. 일제강점기처럼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보여줬던 단단한 공동체 의식이 있다. 여기에 좀 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부분만 조금 보완된다면 안동은 더 멋진 도시, 행복한 도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지난해 문화도시 심사에서는 아쉬운 결과를 맞았지만 분명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5년 뒤의 안동은 더 달라지고 더 건강한 안동이 될 것 같다. 나도 더 배우고 고민해서 반드시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안동이 되도록 할 것이다. 물론 나 혼자가 아닌 시민들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노력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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