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탑의 고장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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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탑의 고장 안동
  • 김혜미 기자
  • 승인 2020.03.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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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전탑이라고만 입력해도 컨텍스트 자동완성으로 전탑의 고장 안동이 나온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 5기 중 3기가 안동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안동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면 전탑이나 전탑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는 많은 사람이 전탑에 흥미가 없고 그 가치를 모른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탑은 흙으로 구운 작은 벽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벽돌탑이다. 이는 중국에서 넘어온 전탑 양식이며 중국의 목탑 모양을 본 따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그렇기에 작은 충격에도 탑 전체가 뒤틀리거나 부서질 수 있어 오랜 시간 보존이 힘들다. 그런데도 안동에는 무려 3기나 남아있다. 그 전탑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탑인 법흥사지 칠층 전탑(국보 제16)과 운흥동 오층 전탑(보물 제56), 조탑리 오층 전탑(보물 제57)이다. 이를 통해 유교 사상이 만연하던 조선 시대 안동의 모습만이 아닌 불교문화가 형성된 통일신라 시대 안동의 모습 또한 간접적으로 느껴 볼 수 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

법흥사지 칠층 전탑
법흥사지 칠층 전탑

안동역 앞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경동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임청각 정문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웅장한 풍채로 서 있는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만날 수 있다. 이 전탑은 그 일대의 지명을 법흥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 때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 있던 탑으로 추정된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1487년 개축됐으며 원형이 잘 보존된 것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이 전탑은 1단의 기단 위로 7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8부 중상과 사천왕을 형상화한 사천왕상을 세워놓았다.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해 1층 몸돌에 있는 감실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감실은 높이 90cm, 너비 54cm로 불상을 모시는 방이다. 탑신은 진한 회색의 민무늬 벽돌로 쌓아 올렸으며 지붕돌은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인 노반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금동제 상륜이 있었다고 한다.

전탑은 1914년 일제가 보수한답시고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이는 공간이 협소하고 완벽하게 복원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복원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 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한다. 또한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덧붙여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해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사용된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조용히 바라보던 예나현(48·대구) 씨는 안동에 가볼 만한 곳을 찾다가 임청각을 방문했다. 그 후 옆에 탑이 세워진 것을 보고 호기심에 가까이 와서 보는 중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웅장하고 잘 보존된 전탑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이 탑과 더불어 안동에 있는 많은 유물이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운흥동 오층 전탑

운흥동 오층 전탑
운흥동 오층 전탑

운흥동 오층 전탑은 안동역 근처에 있지만 주차장 뒤편 깊숙이 숨어 있어 안동 사람들도 잘 모르는 탑이다. 탑 주변으로 아담한 공원처럼 나무들이 심겨 있고 가장 안쪽에 벚나무 연리지도 있다. 이는 해방 전 역무원과 승객이 사랑을 나누며 심었다는 벚나무 두 그루가 연리지가 돼 자랐다는 러브스토리가 깃든 나무다.

이 전탑은 통일신라 시대 때 세워졌고 동국여지승람영가지에 기록된 법림사의 탑으로 추정된다. 탑 옆에 자리 잡은 당간지주가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탑은 높이가 8.35m며 탑신부는 길이 27.5cm, 너비 12.5cm, 두께 6cm의 무늬 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다. 몸돌에는 층마다 감실을 설치했다. 특히 2층 남쪽 면에는 2구의 인왕상을 새겨뒀다. 이는 1층에만 감실을 만든 법흥사지 칠층 전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운흥동 오층 전탑의 지붕돌은 벽돌을 사용한 것에서 오는 제약 때문에 처마 너비가 일반 석탑보다 매우 짧다. 밑면의 받침 수는 1층부터 차례로 10·8·6·4·3단이며 처마 끝에는 기왓골을 받기 위해 총총한 나무를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혀 놓았다. 이러한 지붕 모양은 탑신의 감실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엎어놓은 그릇 모양 장식인 복발만 남아 있다.

영가지에서는 법림사 전탑은 7이며 탑의 머리 장식은 법흥사지 칠층 전탑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 갔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크게 보수했다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또한 이곳은 전탑에 접근할 수 있게 입구를 열어놓는다. 그 때문인지 벽돌 곳곳에 낙서가 새겨져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조탑리 오층 전탑

완전 해체된 조탑리 오층 전탑이다.
완전 해체된 조탑리 오층 전탑이다.

조탑리 오층 전탑은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5층 전탑이다. 다른 전탑과 달리 조탑리 오층 전탑은 기단 위에 크기가 일정치 않은 화강암으로 5~6단 쌓아 1층 몸돌을 형성했다. 1층 지붕(옥개석)부터는 벽돌로 쌓았다. 그 가운데 식물의 형태를 일정한 형식으로 도안화한 장식무늬(당초문)가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이 전탑이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 받침은 1층부터 9·8·7·6·3단이며 다른 두 전탑과는 달리 옥개석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은 없다. 탑신부의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는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됐다. 탑의 상륜부는 훼손돼 모두 없어졌다. 이 탑의 체감 비율은 지붕보다 몸돌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으며 5층 몸돌이 너무 큰 것이 이유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했기에 창건 당시 원형이 상당 부분 변형됐을 것이라 짐작된다. 한편 탑 부근에 석탑재·석등재 등이 남아 있고 주위에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사찰이 있었던 것이라 추정된다.

조탑리 오층 전탑은 안동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438번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한 후 송리에서 하차해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그러나 현재는 전탑 보수 공사 중이라 현재 볼 수 없다. 전탑은 완전해체 작업으로 기초부터 검토해 보수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해체보수는 문화재 보수 방식 중에서도 최고난도라 평가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20년 만에 해체보수 공사를 완료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탑리 오층 전탑 또한 201212월에 시작해 올해가 돼서야 겨우 해체 작업을 끝냈다. 이에 정원구 현장 소장은 다른 건축물을 해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년 안팎이다. 그러나 이번 해체작업은 문제가 생길 시 바로 중단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하면서 진행했기에 오래 걸렸다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겠지만 해체 작업한 시간만큼 더 걸릴 것 같다고 밝혔다. 덧붙여 정 소장은 현재는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해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도면은 이미 흐트러지고 망가진 모습을 토대로 한 도면이기에 복원 설계 도면으로 사용할 수 없다복원 설계 도면은 이 분야 전문가들과 상의하며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탑은 만들어진 당시 모습과 가장 비슷하지만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탑에 관심을

허름한 집이라도 사람이 살면 그 집은 쓰러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틴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그 집은 이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전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전탑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 그렇다면 그도 우리의 마음을 읽고 그 자리에 더욱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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