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락호라 불린 남자, 김용환의 숨겨진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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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라 불린 남자, 김용환의 숨겨진 뒷이야기
  • 이동영
  • 승인 2019.11.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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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마을에서 온 항일운동 정신
드라마틱한 김용환 지사 일대기

지난해 인기를 휩쓸며 최고시청률 18.1%를 기록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항일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작중 변요한 배우가 연기한 김희성은 실제 독립운동가인 김용환 지사에서 따온 설정이다. 노름을 즐긴다는 설정이 인상적인 김희성은 실제로 김용환 독립투사가 그의 숨겨진 독립운동을 도와준다는 후일담이 알려지기 전까지 그의 모습과 일치한다.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 집안을 말아먹을 도박꾼을 칭하는 파락호'라 불리며 도박에 재산을 탕진했다. 현 시가 300억에 상당하는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참봉 김용환 지사. 과연 무엇이 그를 이토록 헌신적인 독립운동가로 만든 것일까.

뿌리 깊은 항일정신 금계마을 의성김씨'

 

안동은 전국 ·시도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해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라 불린다. 의성김씨의 독립운동 유공자는 26명이나 차지할 정도로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왔다.

이러한 의성김씨 가문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학봉 김성일 선생은 1590년에 통신사로 임명돼 일본에 9개월간 파견된 적이 있었다. 학봉선생은 당장 전쟁이 일어날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으나 다음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후 학봉선생은 경상우도(현 경상북도 서부지역) 병마절도사(현재의 군대 계급 소장 정도)로 임명되며 진주대첩에서 왜군에게 큰 피해를 줬다.

이러한 학봉선생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 중에서는 독립운동가가 17명이나 있었으며 여기엔 참봉 김 지사의 할아버지인 서산선생 김흥락과 그의 사촌 김회락도 있었다.

서산 김흥락 선생은 1827년 안동 금계마을에 위치한 학봉종택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남다른 총명함을 보였던 서산선생은 백성들의 고충을 잘 헤아려주는 사람이었다. 이후 1985년에 일어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노한 서산선생은 1896115일 의병운동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해 612일 새벽, 자신의 사촌인 김회락 의병대장을 숨겨두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학봉종가를 기습한 안동부 병사에 의해 자신을 포함한 10여 명이 포박당해 마당에 끌려 나왔다. 아직 어렸던 김 지사는 병사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며 우리 할배 살려 주이소"라고 연신 부탁했으나 발에 차여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또한 의병대장으로 활동했던 김회락은 안동부 병사가 총을 겨누며 위협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고 소리쳤다. 이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김회락 의병대장은 숨을 거뒀다.

손자인 김 지사는 당시 10살의 나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어렸을 적 글을 가르쳐준 인자한 할아버지는 자신의 눈앞에서 안동부 병사에 의해 무릎이 꿇렸으며 같이 있던 김회락 의병대장은 자신의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김 지사는 일본을 향한 치욕과 분노를 느끼며 복수를 다짐한다.

전장을 누벼 다닌 의병 김용환 지사

김 지사가 스무 살 되던 1906년경,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이 김 지사를 찾아와 의병에 합류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던 김 지사는 바로 의병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07년 이강년 의병 부대 참가, 1908년 김상태 의병대장진으로 봉화군 서벽전투에서 대구에서 지원 오는 적병의 정세를 정탐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강원지역과 경북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후 19115월 일본군 헌병대에게 기습을 받아 해산되기 전까지 의병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1920년 이응수, 김규헌과 같이 뜻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독립후원 의용단'을 만들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서기를 맡았다. 그러나 192212월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 중 동료 의용단원 전부가 함께 체포됐다. 이후 10개월 뒤 석방된 김 지사는 일본군의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감시를 받아 독립운동을 도와주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기 어려웠던 그는 가족과 지인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박에 빠져 살아가게 된다.

파락호의 길을 걷다

이후 김 지사는 자신 집안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 지사는 안동 일대에 노름판이 벌어지기만 하면 꼭 끼는 사람이었다. 초저녁부터 노름하다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모두 걸어 따면 조용히 돌아가고 잃으면 새벽 몽둥이야!"라고 외쳤다. 소리가 나오면 주변에 숨어있던 그의 수하들이 몽둥이를 들고 판돈을 쓸어 담고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외지 노름꾼들의 돈을 따서 모아가면서 어느 날에는 하루 만에 거금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날린 전답(논밭)250여 마지기와 선대가 남긴 위토 전답 250여 마지기를 날려 총합 13만 평에 달하는 토지와 임천서원까지 탕진했다. 이렇게 탕진한 재산은 시가 300억 원에 상당할 정도로 큰 재산이다. 이후 그는 학봉종가 명문을 다 말아먹을 종손이 태어났다며 집안과 밖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김 지사는 파락호로 위장해 도박으로 잃은 연기를 하며 그 돈을 숨긴 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노름판에서 막대한 재산을 처분한 것처럼 연기하고 이후 처분재산을 노름판에서 날린 것으로 공인받아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했다. 이후 자금을 비밀리에 다시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만주에 보냈던 것이다. 거의 모든 재산을 만주로 보낸 김 지사는 가세가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의 뜻을 가진 동지가 찾아오면 노자를 챙겨주며 격려했다. 또 다른 일화로는 김 지사의 외동딸인 김후웅이 시집가는 날 시댁에서 장롱을 사 오라고 준 돈을 노름으로 탕진하고 와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울며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이 돈 또한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으리라 여겨지지만 이처럼 하나뿐인 딸에게도 독립운동을 비밀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946년 여름, 독립 후 59세 나이에 김 지사는 병세가 깊어 위중한 상태였다. 이때 같은 독립투사 측근 동지인 하중환 지사가 문병을 하러 온 자리에서 병이 이렇게 깊은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으실 건가? 그동안의 독립운동 내용을 아들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김 지사는 선비의 후손으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끝까지 함구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운 지 이틀 후, 김 지사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광복이 찾아오고 세상을 떠나서야 알려지다

김 지사가 별세한 후 동지였던 하중환 지사는 이대로 김용환 지사의 독립운동을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묻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2년 뒤인 19487, 김 지사의 종상을 하는 날에 제문으로 적어 그간 독립운동과 말 못 한 비밀을 적었다.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이 드러나며 김 지사 역시 숨겨진 그의 업적이 드러나게 된다. 1995815,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 정부에서 의성김씨 가문의 독립지사들에 건국훈장을 수여 한다. 이때 김 지사의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가 아버지 김 지사에 관한 생각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란 글은 김후웅 여사가 어렸던 시절과 자라오며 느낀 감정과 자신의 아버지에게 못다 한 말을 고백한다.

이후 201367EBS의 방송 프로그램 역사체널e'에서 파락호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방영되며 그의 극적인 독립운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김용환의 손자가 말하는 의성김씨'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조상인 학봉 김성일 선생과 그 일가들이 살아왔고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종택이다. 종택은 일자형 안채와 문간채, 풍뢰헌과 운장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운장각에는 유물의 보관과 전시를 위해 세워진 곳으로 의성김씨 집안의 대대로 내려온 유품과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그중 참봉 김 지사는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라 자신의 흔적 중 거의 대부분이 남아있지 않다. 김종성(68·대구) 김 지사의 손자는 조부님은 평생 파락호로 위장해 사신 분이다. 매우 엄하시고 누구에게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래도 일본군에게 요시찰 인물로 감시되어 은폐 활동을 하시다 보니 유품도 거의 남기지 않으셨다. 독립자금을 계산하던 주판, 방송을 듣던 진공관 라디오 그리고 글을 읽을 때 사용하던 화로가 전부다"사람이 들어오면 화롯불에 읽던 종이를 태우셨다. 아마 독립운동과 관련된 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 유품 외에는 김 지사는 자신의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현재 인터넷에 알려진 김 지사의 사진은 사실 본인이 아닌 동명이인인 다른 독립운동가 김용환의 사진이다. 이처럼 비밀에 둘러싸인 만큼 공적이 이후에 드러나기 힘들 뻔했다. 다행히 이후 하중환 지사가 남긴 제문, 같이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의 행적과 독립운동자금 기밀문서에서 그의 행적이 조금씩 드러나 있었기에 늦게나마 세상에 밝혀지게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김 지사의 행동은 당시 선비로서의 행실과 품위를 끝까지 유지한 독립투사로 볼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과 도움을 베풀어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김 지사가 잠들어있는 무덤에는 김일대 선생이 김 지사를 기리는 문구가 적혀있다.

선비의 처세는 끝까지 지키는 지조가 중요하니

재물 가벼이 보고 의리 중히 여김은 견줄 자가 드물었네

왜적의 위협에도 끝내 굴하지 않으셨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세운 공 말씀 않으셨네

조국이 광복되고 영광스러운 공업이 드러났으니

공적을 단단한 돌에 새겨 무궁토록 전하리라

김흥락 지사와 김용환 지사의 건국훈장 애족장이다.
학봉종택을 헬리캠으로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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