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도 양보할 수 없다’ 공들인 간호법 결국 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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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도 양보할 수 없다’ 공들인 간호법 결국 폐기
  • 임혜린 수습기자
  • 승인 2023.06.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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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 위해 우리대학 간호학과 동참
최종 찬성 178명, 반대 107명, 무효 4명

지난달 의료계는 ‘간호법 제정’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2005년 최초 발의된 간호법은 현행 의료법에서 간호에 관한 사항을 독립시킴으로써 간호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법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 13개 보건복지의료법연대가 반대하며 의료계 내 갈등이 격화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간호법 제정안이 지난달 30일 다시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돼 결국 폐기됐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간호법 제정안 재의의 건에 대해 무기명 투표를 실시했다. 표결 결과는 재석 의원 289명 중 찬성 178명, 반대 107명, 무효 4명으로 부결됐다.

의료법 적용받는 간호사

간호법은 어느날 갑자기 발의된 법안이 아니다. 지난 2005년 의사와 의료기관 운영만을 주로 다루는 의료법으로는 폭증하는 간호와 돌봄의 업무를 포괄할 수 없어 처음 간호법이 발의됐고 지난 2019년에 이어 지난 2021년 3월에 세 번째로 간호법이 발의됐다.간호법의 세부 내용을 보면 간호 인력의 ▲처우 개선을 요구할 권리 ▲업무 범위 명확화 ▲적정 근로조건 확보 ▲간호사 실태 조사 및 교육 의무 부과 등 인권침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현행 대한민국 의료인의 의무와 권리는 1962년 개정된 ‘의료법’으로 통합해 규정하고 있는데 당시 의료인 수는 1만 1천 명, 그중 간호사는 3,500여 명으로 30%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 의료인 65만 명 가운데 간호사는 46만 명으로 약 70%에 달한다. 과거 의료법 개정 당시와 비교해 간호인력의 규모가 커졌으며 초고령화에 따라 간호사의 역할은 더욱 막중해졌지만 간호사는 여전히 의사와 의료기관 중심인 의료법에 따르고 있다.

간호법, 왜 필요한가

OECD 보건통계 2020에 따르면 연간 국민 1인당 외래진료 횟수는 OECD국가 중 1위며 평균 입원일수는 OECD 평균대비 2.5배다. 그러나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인구 천 명당 의료기관 근무 간호사는 OECD 평균 8.9명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3.8명으로 평균 이하 수준이다. 또한 간호사 이직 경험률은 73%로 나타났으며 신규 간호사 이직률은 45.5%로 1년 내 절반 가까이 이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간호사 평균 근무 연수는 불과 7년 8개월이다. 의료법 제2조에서는 의료인을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및 간호사로 명시하고 있지만 의료법에 따라 간호사가 수행할 수 있는 업무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다. 보조에 대한 개념이 불명확하며 간호사의 업무 기준은 어디에도 명시돼 있지 않다. 반면 독일, 일본, 캐나다를 비롯한 90개 국은 의사법과 간호법을 각각 제정해 각 의료인을 전문화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간호사의 역할을 다양화, 세분화, 전문화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건복지의료연대, 반대한 이유는?

갈등의 쟁점이 되는 문구는 ‘지역사회’다. 이는 초고령화 사회로의 변화에 따라 간호사의 역할이 명확하게 확장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반영된 문구지만, 간호사가 간호법을 통해 의사가 없는 의료시설 밖 ‘지역사회’를 시작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면 타 직역의 업무 영역을 침범할 수 있고, 간호사가 독자적으로 개원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간호사만을 위한 간호법이 제정된다면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의사법, 간호조무사법 등 13개 의료단체의 단독법도 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권준영 안동시의사회 회장은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돼 통과된 간호법은 타 13개 의료단체를 제외한 간호사만을 위한 단독법”이라며 간호법 제정은 “형평성에 심한 차등이 있다”고 전했다. 또한 “지역사회에서의 타 직역 업무 수행 및 간호조무사 자격시험 응시 자격 학력 상한 제한 등 비상식적인 내용과 여러 직군의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조항이 많은 법안”이므로 충분한 심의와 논의가 진행된 후 처우개선을 하거나 다른 논의 사항 또한 의료법 내에서 개정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의료법에서 이미 간호사는 개원이 불가능하다고 명시돼 있으며 현재도 의사 대신 의료기관 외에 보건소, 학교, 노인복지시설, 장애인시설 등 다양한 지역사회의 보건 활동을 맡아서 하고 있지만 의료법 내 간호 조항은 지역사회에서 수행하는 간호행위를 포함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우리대학 간호학과 학생들이 '간호법 제정'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제공 간호학과
우리대학 간호학과 학생들이 '간호법 제정'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제공 간호학과

 

예비 간호사, ‘간호법 제정 필요해’

우리대학 간호학과 4학년 재학생 또한 지난 4월 26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간호법 제정’이라고 적힌 피켓과 함께 집회에 참석해 간호법 제정에 힘을 실었다. 진동휘(간호·21) 간호학과 학회장은 “간호사가 부족한 이유는 현실의 과도한 업무량 때문이다”며 “간호법을 통해 간호사가 법의 보호 아래에서 전문 업무를 할 수 있어야 환자의 안전을 지키며 전문가로서 소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계의 현실을 지금껏 방치한 정부와 국회의 책임감을 요구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함께 대책 마련할 필요

대한간호사협회는 지난달 31일 대회원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영경 대한간호협회장은 성명서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 약속했던 간호법을 스스로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대통령의 간호법 거부권 행사로 오늘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간호법안 재투표에서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발의, 심의한 간호법의 마지막 명줄을 끊었다”고 비난했다. 이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기에 62만 간호인과 시민들은 간호법의 재투표 부결에 대해 저항권의 발동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간호협회는 내년 총선 전 간호법을 재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김 회장은 “2024년 총선에서 공정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불의한 국회의원을 반드시 심판하고, 국민을 속이고 간호법을 조작 날조한 보건복지부 장관과 차관을 단죄할 것”이라며 “우리는 클린정치 참여를 통해 불의한 정치를 치워버리고, 깨끗한 정치를 통해 2024년 총선 전에 간호법을 부활시키겠다”고 말했다. 법안 폐기로 간호법 투쟁은 내년 총선으로까지 전선이 확대되는 모양새다. 간호협회는 이미 ‘준법 투쟁’과 ‘간호사 면허증 반납’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간호협회는 24개 의료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리스트를 배포한 이후 최근까지 1만여 건이 넘는 불법 진료 사례가 불법진료신고센터에 접수됐다고 전했다.

국민의 건강권과 관련된 간호사의 인권 보호를 위해 시작된 간호법이 원래 취지와 거리가 멀어졌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간호서비스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현재 간호법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닌 숙고와 논의를 통해 간호법 제정안을 보완하고 국민 건강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로 함께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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