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작_세 사람의 비밀은 지켜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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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작_세 사람의 비밀은 지켜질 수 있을까
  • 안동대학교 신문사
  • 승인 2020.12.0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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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비밀은 지켜질 수 있을까

2시간 전 성민이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만해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학 동아리 홈 커밍 데이라. 이 얼마나 영양가 없는 시간낭비모임인가. 차라리 집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지언정 참석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고 참석여부 투표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켜니 카카오톡 메시지가 엄청 와있었다. 채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성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대박! 미경이가 온대. 갑자기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그래서 단톡방에 초대했어!"

"미경이?"

"그래. 야 미경이도 온다는데. 너도 갈 거지? 같이 가자. 같이 카풀해서 내려가자고"

'계속해서 나를 끌고 가려고 한 목적이 카풀이었군.'

순간 반항심이 들었지만 자취를 감춘 미경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구미가 당겼기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홈 커밍 데이 당일, 학교는 딱히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추억여행 세트장을 걷는 것만 같았다. 식당에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그 옆으로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대학생들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한다. 그리고 미경이. 너무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알아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미경이다. 익숙하지만 조금은 낯선 얼굴인 미경이가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곧 먹음직스러운 이탈리아 음식이 차례차례 나왔다.

"우리 때 이런 식당 있었으면 진짜 매일 왔었을 텐데······."

"그니까. 애플파이피자? 이거 이름과 다르게 맛있네."

"그때도 지금도 돈 없어서 못 왔을걸."

홈 커밍 데이라 해봤자 딱히 거창한 거를 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올해 했던 연극제 이야기나 앞으로의 연극제에 관한 피드백, 진로 등에 대해 짧게 대화를 하다 자연스럽게 그때의 동아리 부원들과 앉아 근황을 나누었다. 우리의 관심은 단연 미경이한테 쏠렸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다. 그저 우리들을, 이 시간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싶어 하듯 바라보다 미경이가 말했다.

"? 밖에 눈 온다!"

"은주가 눈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는데······."

누군가 조용히 읊조렸지만 은주. 그 이름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다. 모두 자연스럽게 창밖에 내리는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연극 연습을 하던 도중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밖으로 뛰쳐나와 웃으며 폴짝거리던 은주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은주도 지금 같이 이 눈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식당의 소음들이 점점 희미해진다.

식당을 나와서 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눈이 어느새 소복이 쌓여있었다. 여전히 내 삶 속에서 한 번씩 어지럽게 휘날리는 은주를 닮았다.

 

은주를 처음 만난건 대학교 2학년 전공수업 강의실로 기억한다. 수업이 한시였는지 두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강의실은 점심을 같이 먹은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들어와서 높고 낮은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한자리씩 띄어져 있는 책상과 의자가 붙어있는 책걸상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휴학으로 오랜만에 학교에 온 나는 빨리 이곳을 조용하게 만들어줄 교수님을 속으로 애타게 부르면서 괜히 바쁜 척 연습장에 낙서를 끄적거렸다. 한동안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보니 한 여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본 거 같았다. 눈이 마주지자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내가 너무 바라본 건가 싶어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에 놓인 샤프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나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을 건네려고 그러는 건지 긴장했지만 그녀는 내게 말을 거는 대신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자신과 자리를 바꾸자고 말했다. 명당같은 뒷자리를 바꿔달라는 요구에도 이상하게만치 옆자리 친구는 씨익 웃으며 흔쾌히 바로 승낙했고 그녀와 나는 나란히 앉게 되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다고 해서 굳이 친해져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곧 교수님께서 들어오셨기에 난 그냥 수업을 들었다. 수업시간 내내 정말 정직하게 교수님만 바라보며 수업만 열심히 듣는 내 옆이 지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음 수업 때도 내 옆자리에 앉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책을 아직 못 샀는데 같이 볼 수 있을까요?"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우리는 책상을 붙여서 내 전공 책을 함께 펴놓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책에 낙서해도 돼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질문과 그녀의 엉뚱함에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뭘 그릴지 궁금했다.

". 해도 돼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그녀를 꼭 닮은 여자캐릭터를 그렸다. 그리고는 위에 말풍선을 그리더니 말풍선 속에 '안녕하세요! 저는 이은주입니당^0^/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적었다. 이모티콘마저 그녀를 닮았다. 그림은 정말 못 그리지만 나도 나를 닮은 캐릭터를 은주의 캐릭터 옆에 그렸는데 채 다 그리기도 전에 그녀의 웃음이 피식 터졌다. 수업 중이라고 조용히 속삭이며 은주의 웃음을 진정시키는데 진담을 뺐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거의 은주가 나를 끌고 다닌 거지만. 은주를 따라 학교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에 가거나 신 메뉴를 먹는 것이 우리의 주 목표였다. 은주를 따라 연극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점점 나는 은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은주는 미처 방어할 사이도 없이 내 삶에 스며들었고 우리는 즐거웠다. 은주가 사라지기 전까지.

 

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중간고사가 성큼 다가왔다. 중간고사 공부를 하겠다고 나와 은주, 미경이는 도서관에 모였지만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잠깐 집중하는가 싶었다가도 출출하다고 야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시원한 밤바람을 쐬며 밤늦도록 수다를 떨기 바빴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따사로운 시월의 햇빛이 내리쬐며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불던 금요일, 시험을 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내려가기 위해 나는 정류장에 서 있었고 은주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여보세요"

"시험 잘 봤어?"

"당연히 망했지."

"나도. 큭큭 지금 시간 돼?"

"나 지금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왔는데. ?"

"아 시험도 끝났는데 오랜만에 같이 저녁도 먹고 곧 우리 연극제 하니까. 그거 대본 리딩 좀 맞춰줬으면 해서."

"미안. 집에 안 내려간 지 꽤 돼서 이번엔 꼭 집밥 좀 먹고 쉬다가 오려고. 미경이 시간 안 된데?"

"걔 어제 도서관에서 계속 놀아서 집 와서 시험 공부한다고 밤 샜거든. 그래서 계속 잘 거래."

"그렇구나. 아무튼 난 다음 주 동아리 모임 할 때 그때 갈게. 버스 왔다. 끊을게."

이게 은주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 뒤로 은주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고 나는 한동안이나 그때의 대화를 곱씹어보면서 자책했었다. 연습 열심히 하고 조심히 집에 들어가라고 말해줄걸, 집은 언제든지 내려갈 수 있는데 그날 같이 연습할걸.

은주가 실종되었지만 야속하게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은주 생각이 났지만 성실하게 강의실을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은주의 빈 공간을 증명하듯 미경이와는 서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이로 돌아갔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다시 돌아가는 듯했지만 일주일 뒤 뜻밖의 일이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은주의 옷가지들이 솔뫼 곳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새하얀 발목 양말 한 짝이었다. 길거리에 양말이 떨어져 있는 것은 당연히 이상하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밤늦도록 흥이 가시지 않는 대학가가 아닌가. 모두들 그저 술 취한 한 학생이 벗어놓은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 좀 더 가니 바지가 떨어져 있고, 좀 더 가면 티셔츠가 떨어져있고. 그 뒤로도 속옷, 화장품 등등 발견되었고 이 모든 것이 은주의 것이라고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솔뫼 도로변 옆 논두렁에서 진흙에 얼룩진 대본집이 발견되었는데 은주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꽤 한산했던 솔뫼 거리는 과학수사대와 경찰기동대들로 북적거렸고 어수선했다. 경찰도 소지품이 발견된 곳을 기점으로 범인의 뒤를 쫒기 시작했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범인은 계속해서 대로변에 은주의 소지품들을 떨어뜨리고 다녔다. 마치 경찰을 놀리듯이.

피해자의 옷과 물품이 계속해서 발견되었지만 더 이상 수사에 진전은 없었고 막을 내렸다. 은주의 청바지에서 정액이 검출되었다니 밤늦게 선어대교에서 묵직한 무언가를 강가에 버린 사람을 봤다니 그런 무성한 소문과 괴담만이 생성될 뿐이었다.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성적장학금과 취업준비라는 핑계를 대며 공부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공부에 매달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우울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은주를 가슴 속에 묻었지만 매 순간마다 은주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런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빨리 잊혀졌다.

 

동아리 홈 커밍 데이 때 미경이의 등장은 숨죽이고 있던 은주에 대한 생각에 불을 지폈고 그 불길이 나를 휘감았다. 주체할 수 없었다.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었고 출근을 했지만 일에 하나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은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충동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반차를 내고 10년 동안 외면했던 은주를 마주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으니 도저히 검색을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단서를 쫒다가 주변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은주였다는 그런 최악의 상황만이 떠올라 한참을 망설이다 안동 여대생 실종사건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봤다. 오래전 사건이라 그런지 인터넷 기사가 거의 없었다. 세 페이지 정도 넘기니 5년 정도 전에 작성된 관련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A양이 실종된 지 30일째 되던 날 A양이 재학했던 학교 인근에 A양의 물건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A양의 청바지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과 함께 상의에서 혈흔, 모발 등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정밀 감식을 의뢰했습니다. 그러나 국과수는 감정 결과가 국과수 시험자(분석요원)의 유전자형과 일치, 샘플이 오염된 것으로 확인됐다는 공문을 경북지방경찰청에 보냈습니다. 즉 유전자 분석을 실시하던 국과수 요원의 침 또는 땀 등에 의해 샘플이 훼손됐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건은 장기미제사건이 되어 미제사건수사팀으로 넘어갔습니다.'

수많은 소문들 중 적어도 하나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나와 은주의 관계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은주와 나 사이에는 항상 은주의 자매같은 오랜 친구 미경이가 끼어있었으니 그저 사이좋은 삼총사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확실하게 우리가 연인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루는 은주에게 우리 사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어떤지 물어봤었다. 은주는 딱 잘라서 싫다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은주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걸까, 부보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싫은 걸까 등등 혼자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돌리며 자괴감에 빠질 무덤을 팠다. 그러나 은주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널 사랑해."

은주의 당돌한 고백에 귀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은주는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났었고 당황해하고 부끄러워하는 나의 반응을 좋아했다.

"그러니 더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 분명 누군가 알기라도 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 휘둘릴 거야.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엉망이 되겠지. 또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라도 우리가 헤어지면 여느 헤어진 커플들처럼 서로의 흔적을 지우기에 급급하면서 서로를 헐뜯겠지."

나만 알고 있는 은주의 진짜 생각과 취향들, 우리 둘이서 쌓아가는 비밀스러운 나날들이 나를 더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반박하거나 공개하자고 졸랐어야했다. 은주가 실종되고 나서 나는 그냥 은주의 수많은 친구들 중 하나였다. 나는 철저히 정보에서 배제되었고 그저 웅성거리는 소문만 주워 먹는 엑스트라가 되었다. 가끔 미경이를 동아리에서 보았지만 딱히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연극동아리 내에서 은주의 이름은 은연중에 금기시된 단어였으니 그 시절 나의 정보의 가뭄은 더욱 심했다. 좀 더 정보를 알고 싶어서 기사 밑에 적힌 기자의 이메일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메일 답장은 바로 왔었고 회사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멀리서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서로 알아봤다. 그는 나에게로 성큼 성큼 걸어왔다. 나는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의자를 권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단정한 옷매무새, 내가 상상하는 기자상과 똑 닮았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곧 그는 노트북을 꺼냈다. 나는 그가 열어놓은 노트북에 있는 로고를 보며 기다렸다. 노트북 로딩이 끝났는지 그는 노트북 자판과 마우스를 분주하게 누르더니 화면은 나에게로 돌려줬다. 정보들이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어있었다.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했다. 결국 나도 모르게 기자에게 원망과 아쉬움이 섞인 투정을 했다.

"요즘 기술이 많이 발전되었잖아요. 청바지에 묻어있던 범인의 DNA는 오염되었어도 은주의 다른 옷들이랑 물건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예전에는 찾지 못한 다른 새로운 단서가 나올 수도 있으니 뭐 다시 검사할 수는 없나요? 아니면 오염된 DNA만 끄집어내던지."

"...그게 말이죠. 그때 그 시간에 연극 동아리방 근처에 있던 학생이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은주 씨와 친한 선후배 사이고 은주 씨네 집으로 가는 방향이라고 가는 김에 전해 준다고 해서 줬었다고 하더라고요. 위에서는 다 검사 끝났다하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이니 강호순이니...그때 워낙 바빠서 그런지 그냥 넘겨준 거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은주 씨 가족 분들 인터뷰하러 갔는데 아무것도 못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경찰이 증거물도 제대로 보관 안한 이 내용도 후속 기사로 썼었는데 바로 삭제되고 편집장님도 저한테 이건 손 떼고 다른 기사 쓰라고 했었어요. 꽤 높은 분의 아들인가 봐요. 참 안타까운 사건이라 계속 기억에 남더라고요."

"저 혹시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그때 참고인 사진을 찍었었는데. 잠시만요."

그는 한 폴더를 열어보더니 사진을 띄워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분입니다."

병철이 선배다. 기자님도 옆에서 유심히 보더니 나에게 물어봤다.

"이 분 낯이 익는데 혹시 요즘 뜨고 있는 연극배우 출신 한지훈 배우입니까?"

". 맞아요."

언제 들어도 매치가 안 되는 이름이다. 기자님은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다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분명 이 사람이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서 왜 증거물을 손수 가져다주겠다고 나서고, 또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을까요? 범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공범일지도 몰라요. 한번 만나서 떠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병철이 선배는 은주를 따라 들어간 연극 동아리의 회장 패거리 중 하나였다. 은주는 연기를 하는 것을 정말로 좋아했다.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즐겼다. 그녀가 좋아하는 만큼 재능도 있었다. 무대 위의 그녀를 보고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우는 연기를 할 때도 그냥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 아니고 목소리까지 파르르 떨었고 배역에 따라 비음과 숨소리까지 조절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대사를 내뱉을 때마다 집중하느라 숨을 참았다가 다시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까까지의 우아한 여배우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만화캐릭터나 교수님 성대모사를 하며 나에게 장난을 쳤다. 그녀는 동아리 활동에 언제나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동아리 회장을 비롯한 병철이 선배 패거리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입부원이 들어왔을 때 제일 최선을 다했고 만난 지 30분도 안되었는데 나한테 처음 한 말이 '넌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 원래 조용해? 말 좀 해봐.'였다. 이때동안 예쁜 1학년 신입생들한테만 말 걸고 놀더니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할 말도 딱히 없고 당신들이랑 말 이어가면서 친해지기 싫은걸 왜 눈치를 못 채는 걸까? 배려 없고 무례하고 시끄러운 패거리들이었다. 그리고 여자애들 얼굴 순위나 매기고 몸매품평이나 하고 이런 말을 내뱉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과시했고 어떤 날에는 은주한테 네가 이번에도 비주얼 1등이라고 칭찬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 옆에 항상 여자 친구가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하루는 신입 부원을 뽑는데 조건을 만들어야겠다면서 배우처럼 잘생기고 예쁘고, 술 잘 먹고, 자취하고 등등의 조건들을 내밀었다. 당연히 은주는 연극을 사랑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은 다 받아줘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나는 은주에게 괜히 에너지 쓰지 말고 동아리를 나가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은주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싫어.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난다면 결국 그 절은 어떻게 될까? 나는 나에게 꿈을 심어준 첫 무대가 그렇게 망가지길 원하지 않아. 곧 내가 회장이 되어서 대학의 낭만을 바로 세울 거야."

은주의 눈에서 별빛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은주가 만들어갈 동아리의 모습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동아리 간판배우인 은주가 실종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동아리는 존폐위기에 놓였다. 연말에 있을 연극 준비는커녕 정기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성민이는 이런 상황에 놓인 동아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었다. 동아리 부원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참여를 독려하고 임시 회장을 자청하며 지속적으로 모임을 잡았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착실히 연극 동아리에 몸 담을 수 있었는 것도 성민이 덕분이었다. 성민이라면 분명 병철이 선배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전화해봐야겠다.

"그 형? 전화번호 있기는 한데 나도 연락 안한지 꽤 오래 되었고... 요즘 감초 단역배우니 뭐니 주목받으니 연예인이라고 번호 바뀌었을 수도 있어. 그래도 우선 가지고 번호 보내놓을게"

"고맙다. 담에 밥 살게."

"아냐. 은주 일 때문이지?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나 말해줘. 그거면 됐어."

"알았어. 진짜 고마워."

 

다행히도 병철이 선배는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고 직장동료가 팬이라고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니 쉽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갑자기 친분도 딱히 없는 동아리 후배가 연락해서 경계 당할 줄 알았는데 설설 기면서 부탁하는 내 모습이 먹힌 건지 사인을 건네받은 직원이 SNS에 올릴 미담을 기대하는 건지 어느 쪽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주말 저녁, 병철이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 한 식당에 왔다. 깔끔하고 길다란 복도가 인상적이다. 매장 전체가 개별 룸으로 운영되어있어서 다른 손님들은 마주 칠 수가 없었다. 이제 좀 알아보는 연예인이라는 건가.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와있었다. 친절한 미소를 날리며 사인 받을 직원들 이름까지 다 적어서 챙겨주는 모습을 보니 새삼 연예인인거 같았다.

"최근에 동아리 홈 커밍 데이 있었는데 오시지. 미경이도 왔어요."

병철이 선배는 잠깐 움찔 거리더니 이내 말이 없어졌다. 꽤 긴 침묵이 지속되었고 병철이 선배는 술만 연거푸 마시더니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다 눈물을 흘렸다.

"왜 그러세요?"

"바로 잡으려고 나름 애썼는데······.아직도 그날의 은주의 비명소리가 잊히지가 않아."

술잔을 채워주면서 내가 물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그때의 일을 꺼냈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잖아. 그날은 시험 끝났다고 뒤풀이다 뭐다 이름 붙여가면서 더 마시다가 민석이 형이랑 동아리방에 갔었어. 근데 동아리방에 갔는데 누가 자고 있더라고. 아마 은주였는 거 같아. 그 시간에 연습하고 있는 사람은 은주밖에 없잖아? 그리고 후드티도 은주가 전에 입었는 거 같고. 근데 이 형이 미쳤는지 은주 툭툭 건들어 보더니 만지더라고. 내가 뭐하냐고 그러니까 쫄리면 넌 망이나 보라고 그러고.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지."

말이 한번 터져 나오자 그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동아리 방 문 앞에서 서 있는 동안에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말릴 자신이 없었어. 그냥.......도망쳤어...그런데 내가 그 시간에 동아리 방 앞에 서 있는 걸 누군가 본 모양이야. 참고인으로 조사받으러 출석하라는데 너무 무서운 거야. 어떻게 해야 하나 해서 형 집에 찾아갔는데 나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작정 했는지 문을 안 열어 주더라고. 화가 나서 쿵쿵 문을 발로 찼는데 옆집 사람이 신고했는지 또 경찰 오고. 국과수 검사 조작하려고 쓴 돈이 얼만데 경찰서 들락날락거리냐고 아버지한테 엄청 혼나서 자기 아들도 못 믿는 건지 화도 나고 그리고 그때는 목격자였는데도 이상하게 꼬여서 감옥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잖아. 이것만 없으면 다 끝나겠다 싶어서 충동적으로 증거물 다 태워버렸어······. 이 일 때문에 십 년 동안 잠 한숨 제대로 못 잤어. 틈만 나면 법도 알아보고. 어쩌면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내가 은주의 꿈을 짓밟아 버린 것 같아서 대신 이뤄주면서 속죄하려고 했는지. 정신차려보니 배우하고 있더라고. 네가 연락했을 때 신이 나에게 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더라. 만나기 전부터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으로 왔어."

횡설수설 거렸지만 병철이 선배의 뒤늦은 고백이 정말 고마웠다. 식당을 나오면서 기자님께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오가고 바로 전화기 저편에서 기자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기자님. 조만간 다시 만납시다. 한지훈 배우도 함께요."

 

병철이 선배를 만나고 나서 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막 샘솟았다. 어쩌면 이 오래된 미스터리를 풀고 살아있는 은주를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민석이 선배의 행방은 물론 은주의 행방도 여전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미경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이유 없이 멀어져 어색해지고 은주의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상대이긴 하지만 미경이를 만나야 또 다른 단서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이 알려주고 있다. 또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은주랑 미경이는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대학시절 때도 룸메이트로 지내며 자매같은 단짝친구였기 때문에 은주의 행방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 그저 은주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만이라도 알아보자는 마음에 용기를 내서 연락을 했다.

미경이는 경기도에 살고 있었고 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경기도의 한 카페로 향했다.

"뭐 마실래? 마음같아서는 밥 한끼하고 싶은데 늦은 시간에 미안해"

"괜찮아. 여기까지 와준 것만 해도 고마워. 나도 요즘 일이 많이 바빠서 시간이 잘 안나."

마감시간이라 그런지 음료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가니 손님이 거의 없었다. 막상 만나니 어색해서 한 손을 들어 이마 언저리를 만졌다가 머리도 한번 쓸어 넘기다 결국 그 손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허벅지 위로 떨어뜨리는 나를 보더니 미경이는 피식 웃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넌 잘 지냈니?"

"나도 그냥저냥 딱히 특별한 게 없더라고. 근데 왜 보자고 한 거야?"

"그게......나 요즘 은주 실종에 대해서 다시 알아보고 있거든. 너는 뭐 아는 게 없나 해서. 혹시 은주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짧은 침묵이 오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은주 아직 좋아해?"

"그건 왜 물어봐?"

"글쎄.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 네 대답에 따라서 내 대답도 달라질 거니까."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하고 숨기고 외면하고 비밀스러운 건 진절머리가 났다.

"."

"홈 커밍 데이 때, 그 때 마지막으로 봤어"

그러면서 그녀는 빙긋 웃었다.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분명 은주를 못 봤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날 은주가 왔었다고?"

". 같이 왔었어. 식당 안까지 들어 온건 나 혼자지만."

"? 은주는? 은주는 지금 어딨어?"

은주가 정말로 살아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농담할 기분 아니야. 은주가 실종되고 나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넌 알잖아. 어떻게 지금까지 모른 체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니? 그리고 병철이 선배가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 줄 거라고 했어. 이제 곧 법대로 잘 처리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날 병철이 선배가 민석이 선배가"

"너 미쳤니?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미경이가 내 말을 자르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한 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날...은주 아니야...나야. 생활 패턴 바뀌어서 잠 안와서 그냥 나 은주랑 같이 동아리방에서 대본 리딩 연습 했어. 그리고 은주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쉬고 있었는데 민석이 선배가 왔었고. 내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은주가···은주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개를 떨구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미경이가 말했다.

"책상위에 있는 연필꽂이에서 가위를 집어서 내리찍었어."

"뭐라고······? 설마...설마 아니지? 진짜야? 죽였어?"

"그럼 어떻게 했겠니? 죽이면 안 되니까 이만큼만 힘줘서 찌르자, 여기는 급소니까 피하고 여기를 찌르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찌르니? 괜히 어중간하게 공격하다가는 화만 더 돋우어서 은주 자기 자신까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정당방위가 성립해서 괜찮지 않을까? 법이 그 정도로 냉정하진 않을 거야."

"꿈 깨. 정당방위? 방위를 목적으로 살인을 했다고 말하면 어느 판사가 오구 그랬어요 하고 무죄라고 해줄 거 같니? 아니면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나 위험을 충분히 인식했던 걸로 보이고 방어가 너무나도 지나쳐서 장당방위도 과잉방위도 해당하지 않다고 할 거 같니? 상해치사죄나 아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라 할 수도 있겠고 증거인멸에 사체유기에 붙이려면 뭐든 못 붙이겠니? 거기다가 민석이 선배의 부재에 신경이 가지 않도록 여대생 실종사건을 만들고 관심이 조금 사그라들자 그 날의 옷들을 은주랑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발견될 수 있도록 놓아두고 민석이 선배가 자연스럽게 범죄를 저질러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계획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단서도 안 나와서 아무도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아서 더 쉽게 풀렸지만... 나랑 은주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인 거야."

나라도 그 상황에서 친구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지도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었다. 그렇지만 깔끔하게 뒤처리까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치사든 살인이든 결과적으로 사람이 죽었지 않은가. 법치국가인 이상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법으로 이루어 졌어야 했었고 또한....은주와 미경이의 행동도 그래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미경이는 말했다.

"그럼 그때 나와 은주는 가만히 있어야 했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악몽 속에서 살고 있어.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살인을 저질렀는데 어느 누가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겠니? 곧 셋이서 한번 만나자. 병철이 선배한테 전화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해줘. 그 선배가 입을 떼면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민석이 선배의 행방을 찾게 되어 진실이 수면위로 올라오는 건 시간문제야. 제발 부탁이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짙은 어둠 속에 보름달이 밝게 떠 있었다. 왜 미경이가 나에게 그때의 진실을 털어놓았을까. 내가 이 완전범죄의 마지막 단추인걸까.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우두커니 서서 병철이 선배 번호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김지연(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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