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끝자락, 하회마을 이야기
상태바
안동의 끝자락, 하회마을 이야기
  • 김미애 기자
  • 승인 2019.06.04 13: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개 살 곳을 택할 때에는 지리를 먼저 살펴보고 다음에 생리를 살피며, 그다음 인심을 살피고, 산수를 살펴야 한다 - 이중환 택리지

 

무너지던 양진당, 우뚝 서다

하회마을의 개기 시조인 전서 류종혜 는 본디 풍산 상리촌에 7대를 생활하다 고려말에 하회로 옮겨가기 위해 삼 년 동안 살펴 지금의 대종택(양진당) 터를 길지로 택했다.

그는 집을 지으려는데 기둥을 세우고 나서 그 이튿날 아침에 보면 쓰러져 있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어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비몽사몽 간에 한 도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그대는 본시 이 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으니 여기에 집을 지으려거든 만인에게 착한 일을 한 뒤에 집을 지으라하고 사라지기에 전서 류종혜는 크게 깨닫고 현외(현재 하회 2리 서원마을)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삼 년 동안 만인에게 구휼하고 적선을 마친 뒤에 집을 다시 세우니 집이 바로 섰다는 연유로 하여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형제는 관과정 바로 그 자리에 낙고사라는 세덕사(世德祠)를 세워서, 전서 류종혜, 입암 류중영, 귀촌 류경심, 평창군수 권옹을 모셨다.

300년 동안 매년 춘추로 큰 제사를 봉행해 오다가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철폐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은 서원마을 뒷산 중턱에 위패를 묻은 매판소(埋版所)만 남아있다.

양진당의 입암고택 편액
양진당의 입암고택 편액

 

피천석 이야기

풍산류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기 이전에 가난한 안 씨 집안의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길거리에서 헐벗은 객승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일으켜 집으로 데려와서 극진히 치료하여 원기를 회복시켰다. 객승(客僧)은 노부부에게 보은을 하려 하나 가진 것이 없으므로 다만 후세를 위하여 묏자리를 잡아 드리고자 하는데, 두 곳의 묏자리 중 한 곳을 원하는 데로 잡아주겠소. 한 곳은 자손 중에 3정승이 태어날 수 있는 터요 또 하나는 당대에 천 석의 곡식을 거두어 부자가 될 수 있는 자리요. 하였더니 워낙 가난하게 살아온 처지라 나중에 정승보다 우선 가난을 면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여 천 석을 거둘 수 있는 묏자리를 잡아줄 것을 원하였다. 객승은 지금의 노가리옆 서쪽 산 부게쪽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초상이 나서 객승이 잡아준 자리에 묘를 썼더니 그해에 큰 홍수가 나서 강에 넓은 갯벌이 만들어졌다. 그 곳을 개간해 온 들에 피를 심어 가을에 추수하니 천 석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묘를 피천석 묘라 하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피천석 이야기가 전해오는 장소
피천석 이야기가 전해오는 장소

 

 

서애 류성룡 종가를 들여다보다

서애 류성룡은 나이가 들어가는 시기에 나에게는 세 가지의 한이 있노라고 술회했다.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이 지나치게 많고 높았으나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는 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 충효를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남기고 있다.

 

밖에서 본 충효당
밖에서 본 충효당

 

 

자료 제공 하회마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