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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독립운동
  • 이용규 기자
  • 승인 2019.06.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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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한 사람이 죽어서 독립이 되겠냐마는 이 마음을 후대들이 보고 언젠가 독립을 이루고 나라를 되찾아라

이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독립운동기념관) 신향숙 문화해설사가 자정순국자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라며 말해준 문장이다. 자정순국(自靖殉國)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면서 일본통치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뜻을 내세운 저항이다. 자정순국자는 총 61명 중 경북이 17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목숨 던져 일제에 맞선 경북의 자정순국자 이름이 적힌 비는 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돼있다.

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운동가 배출이 많고 독립운동 51년 역사를 쉼 없이 이어온 곳인 경북 안동에 건립됐다. 2017년 경상북도 독립운동 역사를 교육하고 나라 사랑 정신을 배우는 교육장이 돼 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신 문화해설사는 안동과 영덕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짜인 장날에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고 이때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최소 6~7년 형량을 받았다징역 1~2년을 받은 수도권의 운동가들과는 다르게 더 주목받을만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기념관에는 6·10만세 운동 주역인 권오설의 철관이 전시돼있다. 6·10만세 운동은 순종의 장례일에 일어난 제23·1만세운동이다. 이를 계획한 인물이 권오설(안동)과 김단야(김천)이다. 그러나 3일 전 권오설이 체포돼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동의 안선호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뛰어나오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의 곳곳에서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전국으로 퍼져나가지는 못했지만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합작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설립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한편 권오설은 일제의 강압과 감시로 관에 묻혔다. 2008414, 순국한 지 78년 만에 드러난 관은 차디찬 철관이었다.

독립운동기념관에는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사모관대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법정에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놨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인 아나키즘 운동에서 활동이 두드러진다. 1929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가 붙잡힌 박열과 후미코는 법정에서 치열한 투쟁을 이어갔다.

재현해놓은 법정에는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의 모형도 전시돼있다. 후세 다츠지는 19192·8 독립선언으로 붙잡힌 한인 유학생 변론을 시작으로 박열과 권오설 등 독립운동가 변론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노력을 한 인물로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신 해설사는 우리가 그들의 길과 흔적을 따라왔듯이 우리도 위기가 있을 때 후손들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당시 대부분 학생이 앞장서 독립운동을 했듯이 나라에 위기가 생기면 학생들도 함께 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했다.

 

말모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는 영화 <말모이>의 명대사 중 하나다.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이 1911년에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선생의 죽음으로 미완성된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또한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영화에서는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 있는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 작전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 박훈은 사투리를 모으러 다니지만 일제 탄압이 심했던 터라 쉽지 않다. 하지만 극 중 김판수가 옥 중에서 만난 여러 지역 사람들을 불러 열 사람의 한걸음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까막눈이었던 그는 말모이 활동을 하며 우리말의 민족정신을 알고 한글을 배우며 끝까지 말모이 사전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독립운동가로 그려진다.

영화 <말모이>는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팩션(faction)이다.

영화 당시 배경은 일제강점기로 민족말살정책이 이뤄졌다. 3·1운동으로 터져 나온 민족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고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했다. 나라가 무너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다. 국내에 남은 독립운동가들은 비밀단체를 만들고 자금을 마련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말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움직임을 그려낸 영화가 <말모이>이며 그 중심에는 조선어학회가 있다.

조선광문회의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를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사전을 편찬하려 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초기 원고가 조선어학회로 넘어간다. 그 원고가 조선어학회의 밑바탕이다. 주시경 선생은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해 독립신문 발행에 이바지하다가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조선어학회는 1921년 우리말과 글 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어 연구회로 조직됐다. 이 학회는 연구발표회, 강연회를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한글>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민족의 정신이요 생명인 우리말, 우리글을 담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말을 모으고 말모이가 마무리되던 중 일제가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학자들을 검거했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한다.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어학회가 모은 전국 우리말은 모두 16만 개다. 해방 후 한글학회로 개칭해 현재 한글문화와 국어학 발전 등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안동무궁화

안동무궁화 발견!

안동무궁화는 1992년 임하댐 수몰 지역에 있는 용계 은행나무에서 서울대 이영로, 임경빈 교수가 발견했다. 현장 조사차 안동을 방문한 교수는 한국 식물분류학계에 애기무궁화로 품종으로 등록시켰다. 6년의 연구 개량 신품종 개발로 1999년 성균관대 심경수 교수가 안동무궁화로 명명했다. 안동무궁화는 다른 무궁화와 달리 편편하게 생겼고 꽃잎이 떨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또한 국립중앙과학관 우리나라 야생화에 따르면 하루 만에 지는 다른 무궁화보다 꽃이 더 오랫동안 펴있어 저녁에도 꽃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품종이다.

3.1운동과 안동무궁화

1900년 전후 애국 선각자들은 국가상징 꽃을 무궁화로 선정했으며 나라의 민관 예복 문양을 무궁화로 장식했다. 안동무궁화보존회(보존회)에서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같은 시기 예안향교 명륜당에 무궁화를 심어 가꾼 것으로 짐작한다. 안동에서의 3·1 만세운동은 예안이 시초다. 같은 해 317일 예안장터에서 1,500만 명이 대거 참가하는데 그 중 예안향교 선비 누군가 심어 가꾼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구전이나 기록이 없는 것은 비밀 항일운동의 통례로 비밀리에 인물을 감추고 보안을 취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 상세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 보존회 측 설명이다. 조선시대에 설치한 예안향교는 1973년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됐다.

안동무궁화보존회

안동무궁화는 우리나라에서 수출되는 몇 안 되는 식물자원이다. 보존회는 안동무궁화가 예안향교에 심겨 있는 이유를 향교의 정신을 기리고자 중요한 자리인 중정에 심겨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구 보존회 부회장은 세계적으로도 이 꽃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를 보존하는 것이 맞다원종을 보존하고 또 개량한 품종을 보급해 널리 사랑받는 나무로 만들기 위해 보존회를 창립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부회장은 안동의 또 다른 상징나무로도 손색없다“3·1운동 정신을 다시 한번 새기고 안동 이름을 가진 꽃인 만큼 보존해 이어가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 1일 보존회는 독립기념관 대강당에서 창립총회 행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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