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솔뫼문화상 수필 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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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솔뫼문화상 수필 가작
  • 안동대학교 신문사
  • 승인 2019.12.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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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화

김진희(동양철학·17)

 

20살 무렵쯤부터였다. 태어나서 줄곧 당연하게 부모님과 가족과 함께 살았다. 맞벌이지만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시는 부모님은 일을 하면서도 늘 우리를 챙기고 돌보셨다. 위로 하나 있는 언니는 대학을 가지 않고 20살에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여 바로 일을 나갔다. 집에서 출퇴근하여 직장인이 되어도 우리는 집에 오면 늘 만나곤 했다.

그렇게 살던 내가 대학을 타지에 오게 되면서 나의 통화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그전까지 나에게 통화는 가끔가다 오는 친구와의 통화, 배달음식을 시킬 때 하는 5분도 채 되지 않는 통화, 놀러나가면 언제 오냐는 부모님의 통화가 전부였다. 목소리를 듣는 것보단 문자나 메신저와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편했다. 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나의 감정을 숨길 수도 있었다. 슬플 때도 ㅋㅋㅋㅋ라는 말만 붙이면 나는 웃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늘 학교에 가면 친구가 있었고, 집에는 부모님이 있었고, 언니가 있었다.

혼자 뚝 떨어져 이곳에 오게 되면서 나는 늘 혼자인 기분이 들었다. 부모와 형제, 고향의 친구들이 있음에도 외딴섬에 뚝 떨어져 아무도 없는 고아인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과 술을 먹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고, 재밌는 게임을 하고, 좋은 영화를 봐도 그저 그때뿐이었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둘 수도, 통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갔다.

그러나 문자를 치는 것이 서투른 아빠의 전화가 올 때마다 나는 받기가 쉽지 않았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스레 거짓말을 못할 것 같았다. 문자로는 능청스럽게 잘 지내고 있어, 밥도 잘 먹어, 재밌지, 괜찮아와 같은 말을 하곤 했는데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나는 전화를 몇 번이나 받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 친구랑 놀고 있어, 과제가 밀려서 못 받아 등의 말로 그때마다 아빠의 진심을 넘겼다.

진아, 많이 바쁘나? 통 목소리를 못 들었네.” 아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전활 걸었다. 몇 번을 받지 못한 내가 처음으로 아빠의 전화를 받고 한 말은 그냥...” 이였다. 혼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전화기의 스피커 사이로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에 맥없이 무너졌다. 나는 자주 울었고, 아빠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통화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감정을 쉽게 드러냈고, 내 목소리에 그것들이 실려서는 솔직하게 서로에게 전달됐다. 그 후로 나는 아빠와의 전화를 버팀목으로 삼았다. 타지에서 혼자 외로울 딸을 위해 아빠가 가장 해주고 싶었던 건 어쩌면 매달 보내주는 용돈이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고 밥은 먹었냐고 묻는 따뜻한 목소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버팀목은 아빠뿐만이 아니었다. 아빠는 비교적 일이 바빠 매일매일의 통화는 하지 못했지만, 엄마는 내게 매일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있지 않아도 통화는 이어졌다. 처음엔 엄마에게 역시 아빠와 같은 이유로 전화를 잘 받지 못했다. 특히나 평소 집에 있을 때 이야기만 시작하면 2시간을 훌쩍 넘을 정도로 수다가 심했던 엄마와 나였다. 그런 엄마는 분명 내 마음을 들킬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늘 내 친구였고, 선생님 이였고, 보호자였다. 하지만 엄마는 바쁘다는 나의 문자에도 그럼 내일 전화하자며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시작된 엄마와의 지속적인 통화는 신기할 정도로 내게 큰 힘이 됐다.

정확히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유난히 내게 힘들었던 겨울날부터였을까. 자주 우울해하고,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자주 아프던 나는 그 무렵 혼자서 많이 울었다. 그때부터 엄마의 전화는 내게 하루를 털어놓고 위로하고 공감 받는 하나의 코스가 되었다. 별말이 없을 때는 비교적 빨리 통화가 끊났다. 할 말이 많이 생길 때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가 아플 정도로 떠들어댔다. 마음이 너무 약해져서 이런 나를 엄마가 귀찮아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들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마음을 알고, 어느 때곤 내 전화를 받고 나는 항상 네 편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겨울을 넘기곤 했다.

이 세상 모든 엄마와 아빠가 동일하지 않기에 나는 자주 불평하고 세상에 원망을 하곤 했다. 좀 더 부모님이 부자였으면, 그래서 내가 원하던 길을 망설이지 않고 갈 수 있었으면.. 그런 바램들은 나를 작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바램 없이 나를 대해주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이렇게 잘 자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휴대전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느낄 수 있다. 엄마 아빠의 진심과 내가 정말 특별하고도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걸 말이다.

짧다면 5, 길다면 2시간이 걸리는 통화는 내게 외로움과 거짓된 웃음을 버리게 되는 계기였다. 이제는 슬프면 슬프다 말했고, 기쁘면 기쁘다고 말하게 되었다. 늘 함께하진 못해도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느낀다. 이 작은 매개체가 내게 미친 영향은 나에게 오래오래 더 깊이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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