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치아는 눈을 가려야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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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치아는 눈을 가려야만 하나
  • 서영건 기자
  • 승인 2019.06.0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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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대다수의 법학과 신입생은 첫 학기 수업에서 ‘Fiat Justitia Ruat caelum(비록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행하라)’이라는 라틴어 격언을 한 번쯤 듣는다. 이 격언 속의 Justitia는 라틴어로 정의를 의미하며 고대 로마 신화에서 정의와 법을 담당하는 여신, 즉 정의의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디케, 아스트라이아와도 상징하는 바가 같다. 정의의 여신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상징으로도 쓰이며 전 세계의 규모 있는 법원 앞에는 그 동상이 세워져 있다.

보통 왼손에 엄정한 정의의 기준을 뜻하는 저울, 오른손에는 정의 실현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 있다. 그리고 선입견이 없음을 상징하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으며, 눈가리개를 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여신상 중 우리나라와 같이 눈을 가리지 않은 여신상은 법관이 법전의 내용대로 규범적인 판단을 한다면 굳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특히 대법원의 경우 재판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기에 두 눈 크게 뜨고 사건을 면밀하게 살피고 판단하라는 의미로도 보인다.

사실 해외 각지에서도 저울만 들거나, 앉아 있거나, 눈을 가리지 않는 등 다양한 여신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캐나다, 이탈리아,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대법원 등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역시 우리나라처럼 눈을 뜨고 있다. 본래 고대 정의의 여신상들은 눈을 가리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그 이유는 신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지 않더라도 공정한 심판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도상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면 선입견이 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생각과 조각가의 감성이 만나 양산됐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선입견과 이성이 반영될 것이 두려워 눈가리개로 눈을 가려야 한다면 그것은 정의의 여신이 아니라 정의의 여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눈을 가리지 않고 법전을 든 정의의 여신상에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의 재판은 당사자가 누군지 신분을 보고 판결을 내리며, 검으로 단호하게 불의를 심판할 마음도 없고, 품에 안은 책은 법전이 아니라 족보일 것이다며 풍자적으로 해석했고 이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어차피 풍자는 풍자이므로 눈을 뜨고 가리고는 사실 큰 상관이 없다. 다만 이러한 풍자를 여론이 공감한다는 것은 사법 불신이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헌정사상 최초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국가기관이 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멈추지 않는다. 사법 불신도 언젠가는 종지부를 찍고 정의의 여신상의 상징이 빛날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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